6·25전쟁 초기 낙동강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우들의 모임인 구국용사회. 다부동 전적기념관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구국용사회 김재홍 사무총장에게 그날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파주에 있던 국군 제1사단 병력이 남하해서 전쟁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젊은이들이 전투에 참가하게 된 셈이지요. 다른 지역에서 경찰병력도 많이 투입해 함께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때 함께한 전우들의 친목 모임이 바로 구국용사회에요.”
김 사무총장은 구국용사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 1,50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습니다. 구국용사회 전우 중에는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한 사람도 많아요. 구국용사회라는 명칭은 저희가 만들어 사용한 게 아닙니다. 호국용사가 아닌 구국용사라 불리는 까닭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나라를 구했다는 의미로 ‘구국용사’라는 호칭을 수여해서 모임 이름도 구국용사회가 된 거죠.”
낙동강 전투 당시 20세였다는 김 사무총장. 80세가 훌쩍 넘은 노병은 20세가 되던 해의 9월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듯했다.
“고향이 마산입니다. 전쟁이 나고 북괴에 함락되기 직전이었죠. 당시 미군 제24사단에 학도병으로 합류했습니다. 이후 낙동강 전투가 벌어지자 국군 제1사단에 편입되어서 싸웠어요. 다부동 일대가 얼마나 험준한 산악지형입니까. 55일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사투였죠.”
낙동강 전투가 벌어지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당시 내무부장관 조병옥이 대구 시내를 돌아다니며 젊은이들을 징집했다. 1주일 교육을 받고 참전한 젊은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참전하여 허무하게 숨을 거둔 것이다.
“운이 좋아 살았고 몸도 성하게 돌아왔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병사가 죽어 나가다 보니 낙동강이 피로 물들었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닐 겁니다.”
휴전 후에도 계속 군 생활을 이어갔던 김 사무총장은 5·16 군사정변 때 군을 떠났다고 한다.
“6·25 참전 유공자가 국가에서 받는 돈은 참전수당 월 18만 원이 고작입니다. 나라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너무 무관심하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의 무관심이 더 가슴 아픕니다.”
김 사무총장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젊은 사람들 얼마나 똑똑합니까. 다들 대한민국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잘 알 거라 믿어요. 노병들을 위해 뭘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당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전했다.
매년 9월 하순에는 제2작전사령부가 주관하는 낙동강 전승 기념행사가 칠곡군 일원에서 열린다. 이때에 맞춰 구국용사회도 전장에서 숨을 거둔 전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추모제를 거행할 예정이다.
김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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