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서브메뉴로 바로가기

민족을 위해 폭탄을 던진 사나이

칠곡 출신 순국의사 장진홍

20151118일 (수) 17:05 입력

  • 축소
  • 확대
  • 이메일 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보내기
  • 트위터 보내기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 날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본지에서는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우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순국의사 장진홍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사진 자료: 국가보훈처


장진홍 의사(1895~1930)는 일제에 맞서 대구조선은행에 폭탄을 던졌던 인물이다. 이것은 ‘대구조선은행지점투탄사건’으로 불린다.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1920년대는 3·1운동(1919) 이후, 근대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국내외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던 때이다. 특히 국내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전개한 무장투쟁과 국외인 만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단체의 무력 항쟁, 그리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22살 광복단을 찾아온 청년

 

경북 칠곡 출생인 장진홍은 현재 인동초등학교인 인명학교에서 한말의 유학자 장지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장지필은 장진홍에게 구국항쟁 의식을 심어준 인물이다. 그 당시 장지필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해, 인명·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청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 주는 것에 주력했다.
졸업 후, 1914년 3월 조선보병대에 입대했고, 제대(1916년) 후 곧바로 조국광복투쟁에 나설 것을 결심, 22살의 젊은 나이로 당시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광복단에 가입했다. 1918년 7월에는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교포 청년 80여 명을 모집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1919년 그가 귀국하고 얼마 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부친의 논 5두락을 매각하여 자금을 준비하고 책을 파는 상인으로 가장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에 의해 자행된 학살과 방화, 고문 등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했다. 이때 작성한 조사서는 같은 해 7월 미국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군함 승무원인 김상철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면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부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어느 가을날 ‘다이너마이트’를 잡다

 

1927년 4월경 광복단 동지인 이내성의 소개로 경북 경산의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으로 자칭하는 일본인 ‘호리키리 무사부로(추정)’를 만나 관공서·은행·부호 등에 폭탄을 투척하여 민심을 동요하고 자극함으로써 혁명을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었다. 호리키리는 폭탄에 대한 전문가로,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이었다.


한 달가량이 지난 뒤, 장진홍은 호리키리가 만주에서 몰래 들여온 다이너마이트의 뇌관과 도화선, 그리고 50원의 자금을 받고 폭탄제조법을 주의 깊게 배웠다. 그리고 1927년 8월 그는 폭탄 2개를 시험용으로 제작하여, 칠곡과 선산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에서 첫 번째 성능실험을 했다. 같은 해 10월 16일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그리고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기 위해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조했다.

 

 

사진 자료: 국가보훈처 


1927년 10월 18일은 ‘거삿날’이었다. 장진홍은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을 신문지로 포장해 벌꿀상자로 위장했다. 그는 11시 30분경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소포 4개를 내주면서 거사 목표지점에 송달을 부탁했다. 박노선은 아무 의심 없이 가장 먼저 대구조선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 도착한 박노선은 어떤 사람의 선물이라 전하며 국고계 주임에게 나무상자를 내놓았다. 상자 속에는 폭발 직전의 상태의 다이너마이트가 들어있었다. 당황한 주임과 은행원은 소리를 치며 불이 붙은 도화선을 자른 다음 은행의 자전거 주차장으로 급히 옮긴 후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했다.
오전 11시 50분쯤, 대구조선은행에 도착한 폭탄이 폭발했다. 은행 창문 70여 장이 굉음을 내며 완전히 부수어졌고, 당시 은행에 있던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 위력은 유리파편이 산산이 흩어져 대구역까지 날아갔으며, 은행 주위의 전선이 모두 끊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35세 나이로 옥중 자결하다

 

일경은 폭탄을 운반하였던 여관 종업원 박노선을 체포하여 취조하였으나 장진홍의 신원을 알아내지 못했고, 박노선이 폭탄상자를 들고 은행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장진홍은 선산군 해평면으로 피신하여 안동과 영천에서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신변의 위험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2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간 장진홍은 오사카에 잠입하여 다음 거사를 준비하던 중, 그를 검거하고자 본국에서 온 경북경찰부의 형사들에게 밤 습격을 당해 붙잡혔다.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그는 반년 만에 1심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그 자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사형이 확정되자 그는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를 위해 자신의 생일 전날인 1930년 6월 5일 밤 11시경, 35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1962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진홍 의사의 묘소는 경북 칠곡군 석적읍에 안치되어 있고, 구미 동락공원에는 의사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구미시는 2001년 옥계동 3·1공원에 장진홍 선생 동상을 건립했으나 낡아, 올해 4월 동락공원 내에 장진홍 의사 동상을 재건립하고 제막식을 열었다.

 

정은빈 기자


지역 지역인물 검색
  • 이전
    이전기사
    [기업탐방] 우리 지역 강소(强小)기업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