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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명 대구 시민을 이끌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강북위인전] 신태근

20160224일 (수) 16:0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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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신태근은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다.


지금으로부터 97년 전인 1919년은 3·1운동이 발발했던 연도이다. 신태근 지사가 동참한 3월 8일 만세운동은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3·1만세운동이었다.

 

◆ 3월 8일 장날, 만세운동을 꾀하다

 

1919년 대구에서는 2월 말, 이갑성(李甲成)이 기독교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권유하면서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거사는 지금의 서문시장을 일컫는 서문외장터에서 장날인 3월 8일 오후 1시로 정해졌다.

 

 

 


이들은 남산교회, 제일교회, 서문교회와 성경학당과 대구고등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을 전파했다. 이때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성경학교 학생들은 비밀리에 제휴하여 3월 8일 오후 1시 서문시장에서 공동궐기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3·8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대구 사람이다.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부속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조국 독립 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1919년 2월 28일에는 김창준으로부터 약 600매의 독립선언서를 받아, 그중 200매는 이만집에게 보내도록 했다. 이갑성은 말년에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 이만집은 남성동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거사가 있기 전인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백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거사 당일, 이만집이 민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7백여 명의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 1천 명 시민이 모여 대구 중심을 행진하다

 


▲ 3ㆍ8운동 관련 기사(신한민보, 1919년 5월 5일)

 

3월 8일이 되자, 아침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유인물이 도청을 비롯한 여러 곳에 뿌려졌다. 계성학교 학생 100명, 성경학교 학생 20명, 신명여학교 학생 50명 등이 시장 근처에서 집결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태극기가 배포되면서 독립만세시위는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현재 대구백화점 자리에 있던 달성군청까지 행진했다. 이때 신 지사는 기독교 학생과 신도들을 중심으로 행진을 선도했다.


행진 도중 시위대와 군경은 공방전을 벌였고, 그 사이 군중들이 합류해 시위대열은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열이 종로통을 지나 달성군청이 있는 지점까지 진출했을 때, 대구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여 총기로 탄압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157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검거되었고, 67명이 재판으로 넘어갔다.


시위 후 체포된 신태근은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3·8만세운동은 대구지역은 물론, 대구·경북지역 3·1만세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독립기념관에 의하면 이날에 대한 기록은 <이만집 등 판결문>과 <고등경찰요사>, <조선독립운동(1권)> 등에 남아 있다.

 

당시 이들이 행진했던 3·8운동 행진로는 현재 대구의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중구청은 대구 도심에 3·8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도로를 조성했다. 해당 장소는 동산동 대구제일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서문로 방향으로 이어지는 250m다. 중구청은 이곳을 ‘대구3·8만세운동 행진로’라고 지칭하며, 근대골목투어에 활용하기 위해 보행로를 설치하고 무궁화 60그루를 심었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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