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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에 생을 바치고 자결을 선택한 순국열사 이내성

[강북위인전] 이내성

20160302일 (수) 16:2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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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아는 독립운동가, 순국열사 이내성(1892∼1927)은 구미 진평동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장진홍 의사가 대구조선은행을 폭파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던 인물이다.

 

 

 

■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 전선에 뛰어든 17세 소년

 

이내성 열사는 1892년 4월 1일 경북 칠곡군 인동면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성률(李成律)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이만우(李晩雨)로도 불렸다.


이 열사는 17세 때 현 계성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학교를 중퇴하고, 동지인 장진홍(張鎭弘)과 함께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제대 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독립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한광복회는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경북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대구에 있던 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통합하여 결성했다. 광복단은 의병과 관련 깊은 인물들이, 조선국권회복단에는 계몽주의적 인물들이 많았다.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다음 해부터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대구의 상덕태상회 등을 비롯, 전국 곳곳에 연락거점을 두고 군자금 모집, 친일부호 처단, 독립군 양성 등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1918년 초에 조직망이 발각되어 주요 인물이 검거, 사형당하면서 조직이 파괴되었다.


이때 함께 활동했던 장진홍 의사(1895~1930)는 이내성과 인연이 깊다. 고향이 같은 데다가, 조선보병대 입대, 대한광복회 가입을 함께하고 그 후 여러 독립 투쟁 활동도 함께 한다. 특히 장 의사는 ‘대구조선은행지점투탄사건’으로 유명하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장진홍 의사는 이내성 열사와 함께 일제에 무력 항쟁으로 맞서면서, 그 일환으로 대구조선은행 폭파를 시도한다.

 

 

 


3·1 운동에도 가담한 이내성 열사는 진평동 3·1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매부 이영식(李永植) 목사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 또는 등사하여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다 3월 12일에는 인동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오후 8시, 이 열사는 진평동 주민 200여 명 앞에서 직접 만든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했다.


다음 장날인 3월 17일 다시 같은 곳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9월간 형을 살고 출옥했다.

 

■ 1927년 거사를 치르고 스스로 세상을 뜨다

 

1926년부터 이 열사는 장진홍 의사와 함께 보다 직접적인 대일투쟁을 위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거사준비에 협력한다. 먼저 왜관 지역의 공공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제조했다. 다음 해 5월 장진홍 의사가 대구지점 조선은행을 폭파할 때 그는 총참모로 활약했다.

 

 


1927년 5월 28일 11시경, 이내성, 장진홍 등은 꿀로 가장한 상자 4개를 조선은행지점장, 식산은행지점장, 경찰서장, 도열사 등에게 전달하도록 박노선(朴魯宣)에게 의뢰했다. 이 중 1개는 조선은행지점장에게 전해졌지만, 나머지 3개는 운반 도중 실수로 노상에 떨어져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이날 조선은행에서 터진 폭탄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은행 창문 70여 장이 굉음을 내며 부수어졌고, 유리파편이 산산이 흩어져 대구역까지 날아갔으며, 은행 주위의 전선이 모두 끊어졌다고 한다. 당시 은행에 있던 은행원 1명, 일제 경찰 5명, 통행인 1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날의 사건은 대구 지역 독립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 열사와 동지들은 이후에도 주요 인물 폭살과 시설 파괴를 꾀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경찰의 수색이 심해지자 추격을 피하여 구미에서 은신하던 중 1927년 8월, 36세의 나이로 자결 순국을 선택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내성 열사의 묘소와 묘비는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 있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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