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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보 동맹휴학을 주도한 세 친구

[강북위인전]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운동가

20160309일 (수) 16:35 입력 20160309일 (수) 16: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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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든 세 친구가 있다. 바로 정행돈, 이두석, 이창기다. 이 세 독립운동가는 모두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 민족적 차별에 들고 일어난 학생들

 

1920년대 일제는 우리 학생들에게 비교육적 행위와 민족적 차별을 일삼았다. 상황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이하 대구고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구고보 전체 교사 중 한문을 담당하는 ‘양재기’ 선생 외에는 모두 일본인 교사였다고 한다. 그러다 1926년 2월 27일, 한 교사가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학생들을 모욕하자, 2~3학년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대구고보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통해 학교 측에 제시한 요구 사항은 △조선역사를 가르칠 것, △악질 일본인 교사 축출, △조선인 교사 증원, △학생들의 서신 검열 중지 등이었다. 대구고보의 동맹휴학은 식민지 교육과 민족차별에 반발해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의 하나였다.


정행돈과 이두석, 이창기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31년 11월에 일어난 동맹휴학을 주동했다. 학교에서 친일 교사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였는데, 이 일로 인해 강제 퇴학을 당했다.


한편, 1916년 5월 16일 대구향교 내의 ‘사립협성학교’를 인수하여 설립된 대구고보는 1917년 대봉동 신교사 자리로 이전했으며, 1925년 4월에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938년에는 경북중학교로, 1953년에는 경북고등학교로 개명되었다. 그 후 1954년 대명동으로 학교 위치를 이전했다가, 1959년 다시 대봉동으로 돌아왔으나, 1985년부터 지금까지는 수성구 황금동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료= 독립기념관

 

◆ 고향으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다

 

다음 해인 1932년 세 사람은 고향인 왜관에서 ‘왜관청년동지회’를 조직했다. 왜관청년동지회는 일제의 농촌 진흥운동이 진행될 때, 농촌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야학을 열어 농촌 청소년들에게 글과 산술을 가르치는 동시에 “오늘 같은 교육제도는 모두가 일본인 위주이며 조선민족의 정신을 소멸시킬 뿐이므로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을 위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힘썼다. 이들의 활동은 ‘왜관청년동지회사건’으로 불린다.


이러한 활동은 1938년 2월 무렵 일경에게 발각된다. 일경은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청년동지회를 탄압하고, 주동자 3명을 체포했다. 정행돈과 이창기는 1939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었고,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두석은 끝내 두 발로 교도소를 나오지 못했다. 체포된 후 일경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한 이두석 열사는 경찰에 체포된 지 한 달도 채 안 된 3월 23일, 27살의 젊은 나이로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했다.


이두석은 독립운동가 이수목의 장남이기도 했다. 이두석의 아버지 이수목은 국권회복운동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으로 참가하여, 자금모집과 선전활동을 했다. 또, 1944년 8월 10일 여운형, 조동호 등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예지하고,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할 때 중앙조직의 재무부 담당자로서 자금조달 및 자금관리 등을 맡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또, 정행돈을 말할 때는 형인 정행국 열사를 빼놓을 수 없다. 순국열사 정행국(1896~1921)은 1914년 8월 서울에서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추적을 받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했던 인물이다. 1919년 5월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왜관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활동을 주도했으며, ‘동창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21년 11월 일경에 피체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했다.


정행돈은 정부로부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이두석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이창기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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