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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위인전] 독립운동가 이수목

30년 청춘을 독립운동에 바친 운동가, 이수목

20160323일 (수) 15:5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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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출신인 독립운동가 이수목은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건국동맹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스물다섯 청년, 독립운동을 시작하다

 

 

 

1890년 8월 2일에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매원리에서 태어난 이수목(李壽穆)은 25살경,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먼저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에 속해 활동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수목이 단원으로 활동했던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안일암(현 안일사)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다. 이수목은 여기서 자금모집과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박상진(朴尙鎭)을 주축으로 움직인 이 단체는 혁신 유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의 활동 본부는 박상진의 상덕태상회였고, 그 밖에 활동 거점은 서상일의 태궁상회, 윤한병의 향산상회 등으로서 모두 곡물상회였다. 단원들이 대부분 부호이거나 중류 이상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어, 이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거둬들여 만주의 무장독립군에 제공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국내 항일민족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했던 1910년대에 조직, 활동하여 항일민족운동의 역량을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로 연결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 후 이수목은 1932년부터 장남 이두석(李斗錫)의 항일 활동을 도왔다. 여기서 이두석은 대구고보 편에서 소개했던 독립운동가다. 이두석은 일제의 농촌 진흥운동이 진행될 때, 농촌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왜관청년동지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인물 중 하나로, 운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순국열사다.

 

■ 30년 동안 독립운동 끝에 광복을 맞이하다

 

그 후 1944년 8월 이수목은 ‘조선건국동맹’ 중앙조직의 재무부 담당자로서 자금조달 및 자금관리를 맡았다.

 

 


이수목이 앞장서 활동했던 조선건국동맹은 광복 직전,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던 무렵에 조국광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단체다. 1944년 8월, 위원장 여운형을 선두로 이수목, 조동호, 현우현 등 국내 사회주의자 일파들이 모여 조직했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세포조직을 넓혀 여러 보조단체를 두고 청년노동자운동, 철도종업원운동, 교원세포조직운동 등 활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4일에는 이들의 활동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조동호·이걸소 등 간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11일에는 일본의 항복을 미리 알고 이만규로 하여금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했다. 8월 15일 일본항복과 동시에 장권(張權)으로 하여금 치안대를 조직하게 하여 건국청년치안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국동맹은 조직 내 다툼을 겪었고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과 더불어 동맹원들은 각각 여러 정당과 정파에 흡수되거나 분산되고 말았다. 그 뒤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이 결성됨으로써 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한다고 결의하고 사실상 해체했다.


이수목은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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