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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까지 옥고를 치르며 일제에 맞선 노장

[강북위인전] 장석영

20160330일 (수) 16:03 입력 20160330일 (수) 16: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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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은 칠곡 출신의 일제강점기 유림 대표 독립운동가다. 장석영은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한창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번질 때는 성주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 장석영(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민족수난기 이주한인의 고난을 알리다

 

장석영은 1851년 10월 24일에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서 전 형조참판 장시표(張時杓)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인 이진상(李震相)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을 익혔다.


먼저 장석영은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침탈조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승희, 곽종석 등 유생 3백여 명을 모아 ‘청참오적소’를 올렸다. 청참오적소는 을사늑약의 체결에 가담한 다섯 명의 매국노, 즉 을사오적의 처벌을 상소한 것이다.


장석영의 본격적인 항일투쟁은 1907년부터 시작된다. 1907년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의 ‘보상회장’으로 추대되어 비밀결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직을 맡아 의연금 모집을 주도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2년에는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하여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 요좌기행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요좌기행은 장석영이 해외 독립운동기지와 이주개척지에 거주하는 이주한인의 동태를 기록한 책이다. 한말 민족운동가들은 1905~1910년 을사늑약과 국권상실을 전후해서 만주 및 시베리아지방으로 대거 망명,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설정했다. 장석영도 적당한 망명지를 물색하고 먼저 떠난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 방법, 수단 등을 논의하기 위하여 그 일대를 여행했는데,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 이 책이다. 그 내용은 각 지역의 지리를 비롯, 인물·풍속·산물·학문·역사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특히 그곳 이주한인의 생활상과 동태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이 책은 일제에 의한 민족수난기에 한민족의 활발한 국외이주 개척과 이주한인들이 겪는 고난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 1919년에는 곽종석, 김창숙 등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한다. 일제가 광무황제에게 결재하도록 강요한 ‘독립불원서’에 유림들이 들어있음을 알고,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고자 했다. 장석영은 유림대표 137명 중 1인으로 서명하면서, 소위 ‘파리장서’라고 하는 2,674자의 청원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 1919년 성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다

 


▲ 현재 관제묘 뒷산 (출처: 독립기념관 자료실)

 

장석영은 3·1 독립만세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이기정, 성대식, 송수근 등의 유림과 접촉하여 일정을 계획했다. 이들은 만세 날짜를 성주 장날인 4월 2일로 정하고 뜻을 같이할 유림들을 모았다. 여기에 별도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던 유진성 등 기독교 사람들이 힘을 보태면서 연합전선이 이루어졌다.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면 경산동(현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시위군중의 수가 3천 명을 넘었다. 경찰이 발포하며 이를 막았으나, 군중들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싸우며 밤늦게까지 만세를 불렀다.


이 자리에서 일본 경찰이 주동 인물을 연행하여 시위군중의 분노가 고조되자, 겁을 먹은 경찰들이 발포하여 군중은 일단 해산했다. 이들이 재집결하여 일본인 가옥을 방화하고 경찰서를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일본 경찰은 일본인들을 경찰서 내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소문대로 오후 11시 재집결한 시위군중과 일본 경찰 사이의 무력충돌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성주 만세운동을 함께 주도한 송준필은 장석영의 둘도 없는 단짝이라 할 수 있다. 경북 성주 출신인 송준필은 어린 시절부터 장석영과 함께 이진상의 강학에 참석했고, 1919년 ‘파리장서사건’ 때도 장석영과 더불어 활동했다. 성주 만세운동 때는 일본에 독립을 전하는 ‘독립통고문’ 3천 매를 인쇄, 살포했다.


한편, 성주 만세운동 이후 일본 군경은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펼쳤고, 이때 장석영을 시작으로 송준필, 이기정, 성대식, 송수근 등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주동 인물 중 하나였던 장석영은 69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2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정부는 장석영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성주 3·1만세운동은 유림과 기독교의 연합으로 거대한 민족운동을 이끌어냈다는 점이 주목받는다. 만세시위를 벌인 관제묘의 이름은 ‘관성전’으로 바뀌었으나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다. 대나무 숲이 남아 있어 산의 위치를 가늠할 수는 있지만 산 정상 부분에 성주여자고등학교 체육관이 들어서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장석영의 고향인 각산리에는 장석영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녹동서당이 있고, 이곳에 1999년 3월에 세운 ‘회당장선생사적비(晦堂張先生事蹟碑)’가 있다. 매년 광복절, 이곳에서는 장석영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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