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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주고 잘 받는 좋은 세상을..."

전인철 편집주간의 함사세요~

20200923일 (수) 09:02 입력 20200923일 (수) 09: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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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 기본만 보더라도 혼자서 100%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설사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 있어 저 혼자 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간접적으로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고, 뜻이 높은 종교적 구도자 정도가 아니라면 혼자 살기도 어렵고 그리 사는 게 썩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닌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분업인데, 이 분업이 낳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라는 맹점에도 불구하고, 그 효율성에서는 가히 타의 추종을 허락지 않습니다. 인류가 이만큼이라도 잘 살게 된 게 다 더불어 살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무료사진>


인간사 모두 주고받기


사실 인간사 모든 이야기는 주고 받기로 풀어볼 수 있을 겝니다. 우리가 흔히 쓰듯 영어로 기브 엔 테이크(Give & Take)’라 일컬어지는 것 말입니다. 개인들 간에도 그렇고 집단이나 문명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교류와 소통에 더디거나 부진한 개인, 집단, 문명은 도태되기 십상입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암튼 살아간다는 것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상대에게 그 무엇인가를 주고 또 받는 일일 것입니다. 주고 받기가 의도적인 경우도 있고 무의식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람이 원만히 잘 살아가려면 잘 주고 잘 받아야 할 겝니다. 주고 받기를 하는 사람살이의 경우를 몇 가지 유형별로 살펴보렵니다.

첫째, 받을 생각 없이 주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불교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생각하면 될 겝니다. 아무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무한히 주는 존재입니다. 아김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우리가 보통 성인(聖人)’이라 칭하는 이들이죠. 사랑과 자비의 화신들입니다. 종교인들에서는 종종 찾아지지만 일반인의 경우는 참 드뭅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없진 않습니다. 가장 가까이 부모님 특히어머니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두루 넓진 않지만 최소한 자식에게 있어 어머니는 무주상보시의 화신입니다. 끝없이 아낌없이 내놓습니다. 사랑은 못해 준 기억 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더 주지 못해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입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성모마리아가 모성(母性)의 신격으로 자리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겝니다.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 길 밖에도 가지 않고 / 어머니는 달이 되어 / 나와 함께 긴 밤을 걸었다’(김태준 사모곡’)

이런 사랑에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중에 돌려받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도 아닙니다. 서양 속담에 신은 온 누리에 다 깃들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숭고한 사랑입니다.

 

먼저 주는 사람도


둘째는, ‘먼저 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잠재의식에는 받을 생각이 있지만, 다시 말해 무주상은 아니지만 굳이 꼭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주겠다는 생각이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먼저 주면 (어떤 형태나 경로로든) 결국은 받게 된다는 걸 천성적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주변으로부터 좋은 사람’‘괜찮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갑에게 뭘 주었다고 해서 반드시 갑에게서 돌려받을 필요는 없다는 걸 압니다. 오히려 갑에게 준 것을 갑과 인연된 을에게서 받게 되면 더 귀하고 중하다는 걸 압니다. 대부분의 세상사가 그리 엮어져간다는 걸 압니다. 이들은 또 오늘 준 것을 당장 오늘 되돌려 받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인연이 숙성돼 때가 되어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는 언젠가는 꼭 온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조급하지 않습니다. 방만하지도 않습니다. 주는 것은 내 의지대로 되지만 받는 것은 인연과 때가 익어야 되는 것을 압니다. 내 의지에 반하는 양태가 삶의 진면목이라는 역설의 이치를 아는 이들입니다.

 

얌체짓은 말아야


셋째는 받으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이에 해당된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먼저 주지 못하는 것은 주고서도 되돌려 받지 못할까봐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그다지 망설일 까닭이 없을 겝니다. 한마디로 본전 생각을 한다는 거죠. 줬다가 못 받으면 결국 나만 손해 아니냐는 셈법인데, 이런 사람들은 이해타산에는 재빠를지 몰라도 지혜롭다고 하긴 좀 그렇습니다. 항상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살아야 하니 썩 편한 삶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첨언이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이 꼭 물질이나 금전에만 한정된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마음씀씀이에 해당하는 경우가 더 많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받으면 어느 정도 되돌려줄 줄도 압니다. 의식으로는 그리 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 여기는 것이고, 무의식적으로는 되돌려 주는 게 없다면 나중에 결국은 더 큰 손해를 보리라 짐작하는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대개의 경우 주고 받기의 계산법이 자의적이라, 주는 사람이 열을 주었다 생각한다면 받는 사람은 일곱이나 그쯤 될까요. 모든 인간관계 갈등의 근원입니다.

 

그게 잘 사는 걸까


넷째는 받고도 잘 안주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 같은 유형화는 현실을 틀에 짜맞춰 구획화 해버리는 위험이 상존합니다. 이 유형들은 사고의 방편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고 받는 것도 결국 정도의 문제니까요.) 이런 부류는 남들이 보기에는 얌체에 인색한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은 셈법이 아주 정확하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이 판단하는 자기모습보다는 남들이 판단하는 자기모습이 더 정확하고 또 더 중요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려면 그 하늘이 주변 이웃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 또한 새겨야 할겝니다. 독자적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안 주고 안 받겠다는 사람입니다. 살아가면서 현실적으로 안 주고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안 주기도 어렵지만 안 받기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아무 것도 안 받는다면 기초적인 의식주마저 해결 못합니다. 다만 이런 이들은 의도적으로, 또 가능한 한, 안 주고 안 받겠다, 즉 내 것 내가 먹고 살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자들인데, 어찌 보면 받고도 안 주는 사람의 극단적 형태가 자기 합리화를 위해 표방하는 자세라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사는 재미를 결코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이들이라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유한한 존재인지라 삶은 안 주고 안 받기가 아니라 잘 주고 잘 받기가 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잘 주려면 우선 가진 게 있어야 합니다. 영혼이든 육신이든 물질이든 줄 게 있어야 줄 수 있겠지요. 또 잘 받기도 중요합니다. 받아들일 빈 마음 빈 자세가 선결돼야 할 겝니다. 받고도 받은 줄 모르는 배은망덕은 아니어야겠지요.

이 글로 만난 당신과 저는 무얼 어떻게 주고 받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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