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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마당>

20201015일 (목) 09:1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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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우리말 - 도무지

 

도모지(塗貌紙)는 옛날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행해졌던 형벌이었다.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착착 발라 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 쉬어 죽게 되는 형벌이다.

끔찍한 형벌인 '도모지'에 기원을 두고 있는 '도무지'는 그 형벌만큼이나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한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문자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기여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어떤 문자를 염두에 두고 지었나? 100여 개의 문자 가운데 제작자와 제작 원리, 그리고 제작 이념이 정리되어 있는 유일한 문자는? 언어학 연구에서 세계 최고라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언어학대학이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실용성 등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1등을 차지한 문자는?

컴퓨터 자판에서 모음은 오른손으로, 자음은 왼손으로 칠 수 있는 유일한 문자는? 이동전화의 한정된 자판을 가장 능률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 디지털시대의 총아로 떠오를 문자는?

대지의 작가 펄 벅이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평가했고, 알파베타의 저자 존 맨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말한 문자는? 언어학자 라이샤워 교수가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제라고, 시카고대학교의 매콜리 교수는 “109일이면 꼭 한국 음식을 먹으며 지낸다.”며 존경심을 털어 놓은 문자는? 영국 리스대학교의 제프리 샘슨 교수가, 기본글자에 획을 더해 동일 계열의 글자(, , )를 만든 독창성은 어떤 문자에서도 볼 수 없다고 칭송한 문자는? 그런데 정작 그 나라 사람들은 그 귀함과 고마움을 잘 모르는 문자는?

 

한겨레신문의 곽병찬 기자가 2005109일에 쓴 글이다. 답은 물론 세종대왕의 최고 걸작품인 한글이다. 곽병찬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글의 귀함과 고마움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이 미국에 의지하다 보니 미국문화와 영어를 선망하는 의식이 심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어보다 영어를, 한글보다 로마자를 더 숭상하고 동경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는 상품 이름만 살펴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1991년 동양제과는 님에게초콜릿을 출시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을 선점한 롯데 가나초콜릿의 아성을 조금도 뚫지 못했다.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이름을 투유로 바꿨다. 그러자 매출이 10배 이상 뛰었다. 사람들은 님에게라는 우리말보다 투유라는 영어가 더 멋지고 세련되어 보여서 님에게를 사지 않고 투유를 산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한글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

그런데 한글은 말소리를 정확히 적을 수 있는 문자, 누구나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문자,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가장 잘 맞는 문자로서 21세기 들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더욱 각광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부톤 섬에 있는 바우바우시(인구 20만 명)는 최대 부족인 찌아찌아족(8만 명)의 말을 표기하기 위해 로마자와 아랍문자를 도입해 봤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다. 찌아찌아말은 격음이나 마찰음이 많은데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바우바우시는 이 때문에 소리 표기가 쉬운 한글에 주목하고, 2008년 훈민정음학회와 한글 사용 및 한글교사 양성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한글을 도입했다.

19세기 중국에서도 한글을 수입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높은 문맹률이 어려운 한자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문자를 중국의 소리글자로 도입하려고 했다. 당시 조선 문자를 도입하려는 계획은 망한 나라의 글자라는 반대에 부닥쳐 백지화되었다.

세종은 한글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의 김석연 명예 교수가 10년 이상 실험한 결과 50분이면 미국 대학생들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적고 간단한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이힐의 기원

 

선뜻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적어도 18세기말까지 유럽에서는 변소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저 아무데서나 싸고 갈기는 것이 남녀노소 또는 신분의 차이를 떠나 일상화되어 있어 거리는 온통 대소변으로 흘러 넘쳤다.

심지어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조차도 변소가 없어 화려한 궁중무도회에 참석했던 귀부인들이 복도 후미진 곳이나 또는 뜰앞 정원수 밑에서 마구 용변을 처리했기에 궁전 앞길은 '신음의 가로수 길'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당시 독일의 팔쯔 선제후 칼 루드비히의 딸이며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필립 1세의 아내인 엘리자베드 샤를로테(1652~1722)가 하노후 선제후 부인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의 이 같은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대변에서 얼마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모르면서 용변 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또 용변을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궁둥이를 까내리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역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이 모두를 참지 못하고 억지로 배변을 참음으로써 지금 커다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 병은 의사의 조언을 받아 지금 당장 아무데서고 대변을 보면 곧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한길이건 공원이건 또는 남의 집 대문 앞이건 눈치 볼 것 없이 그대로 배변하십시오.

부끄러운 쪽은 궁둥이를 깐 사람이 아니라 이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저의 의견에 앞으로 부인께서 전적으로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 파리 시민들은 아무데서나 용변 보는 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물론 일부 가정에서 요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들 역시 이튿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 내용물을 거리에 내다 버렸으므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비가 조금만 와도 이 인분과 거리의 진흙이 뒤범벅돼 무릎 아래를 내맡기지 않는 한 통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시 파리는 하수도 시설이 전무했고 또 거리도 포장되어 있지 않아 이러한 상태를 더욱 부채질했다.

당시 파리 거리가 이처럼 인분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이를 밟지 않으려 뾰족한 하이힐이 고안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유머리스트 처칠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총리로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어 냈고, 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학생 때 성적이 최하위 그룹에 속한 데다가 성급하고 허영심이 많았다는 비판도 나돌았다니 흥미롭다.

그가 낸시 애스터라는 영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과 벌인 입씨름 한 토막.

낸시가 여보시오, 처칠 씨. 당신은 왜 이렇게 술에 취해 있는 거요.”라고 핀잔을 주자, 처칠이 이렇게 답했다. “내 술은 내일 아침이면 말끔히 깨겠지만, 당신의 그 추한 얼굴은 내일 아침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 거요.”

낸시 : “처칠 경, 만일 당신이 내 남편이라면 당신이 마실 음료수에 독을 넣겠소.”

처칠 : “마담, 만일 당신이 내 아내라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마셔 버리겠소.”

처칠은 이런 말도 남겼다.

“30세 이전에 자유당원 아닌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다. 30세가 넘고서도 보수당원이 아닌 사람은 뇌가 없는(골이 빈) 사람이다.”

그는 위기에 처하거나 난처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나는 나라를 위해서 언제라도 한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다만 그 시기가 일각이라도 늦게 오기를 빌고 있을 따름이다.”

처칠은 90세에 별세했는데, 말년에 한 젊은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기자 : “내년에도 다시 뵐 수 있다면 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처칠 : “여보게, 내년에 만나지 못할 이유가 뭐 있는가. 내가 보건대 자네는 아주 건강한데 아무렴 내년까지는 살아 있을 것 아닌가.”

그는 75세 때에 역시 한 기자로부터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받아 넘겼다.

나는 언제든지 하느님과 대면할 각오가 되어 있다. 다만 하느님 쪽에서 나와 대면한다는 큰 시련에 직면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기적 같은 일을 네 번 경험한 펠레

 

축구에서도 한 사람의 영웅은 축구의 역사를 바꾼다. 그리고 그 자신은 전 세계 수십 억 인류의 '인간문화재'가 되기까지 한다. 펠레가 바로 그 좋은 예다. 펠레는 자신이 겪은 기적 같은 네 가지 경우를 곧잘 이야기한다.

그 첫 번째는 산토스 FC 팀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오랫동안 민족 분쟁이 계속됐던 아프리카 가봉공화국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는 순간부터 며칠 동안 분쟁이 딱 그친 것이다.

두 번째는 콜롬비아에서 경기를 벌였을 때 심판의 오심으로 펠레가 퇴장당하자 관중이 모두 일어나 펠레 대신 심판을 퇴장시키고 펠레를 다시 운동장으로 불러 경기를 한 일이다.

세 번째는 196241일 유럽 53개 신문에 일제히 '펠레 이적', '레알과 계약', '밀라노와 계약' 등의 기사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것은 만우절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 신문들은 사전에 서로 의논하거나 귀띔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때 브라질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멕시코 관중에 둘러싸여 몸에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을 빼앗겨 팬티만 남았던 일이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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