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서브메뉴로 바로가기

[전인철 칼럼]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꾼다”

20201025일 (일) 09:51 입력

  • 축소
  • 확대
  • 이메일 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보내기
  • 트위터 보내기

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최근 우리사회는 이념집단이나 계층, 세대 등을 가릴 것 없이 상호 갈등양상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양상이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사회 유기체의 통합과 질서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는 정치권과 공공 영역이 제 스탠스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가장 아쉽습니다.

촛불탄핵과 지난 4.10 총선 참패 이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야당의 난맥상도 그 하나요, 책임정치 포용정치를 외면한 채 마이웨이 가도를 달리는 집권여당의 정치력 부족도 또다른 하나입니다. 비판 아닌 비난만 횡행하고, 타협 아닌 파워게임만 범람합니다. 서로가 이런 사태의 책임을 '네 탓'으로 돌린 채 눈과 귀는 막아버리고 오로지 입만이 난무합니다

더욱이 적폐개혁에 저항하는 세력들, 특히 검찰과 수구언론의 시대착오적 국민 기만과 모독은 극을 치닫고 있습니다. 시대적 요청에 부합할 만한 개혁이 과연 가능이나 한 것일까. 의구심마저 듭니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찬 기득권들의 저 강고한 카르텔에 국민들의 개혁 피로감만 높아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자부하는 종교세력이 오히려 혹세무민을 자행하며 세상의 암적 존재로 드러나고, 세상을 속여 제 이권만 챙기려는 가짜뉴스들이 비 온 뒤 독버섯처럼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갈등이 약이 될까, 독이 될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과 분열, 이해의 대립은 어떤 측면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또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다양한 생각과 구상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의 믿음과 생각을 소신껏 드러내는 건 국민의 기본권이지요. 개인과 집단의 다양한 견해들이 표현되고, 또 갈등하고 조정되어 최종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련의 흐름들은 자유민주사회의 필연이고 필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사회에서 보듯 개인이나 집단의 견해나 주장들이 통합조정되지 못하고 서로 걷돌아 사회적 기회비용만 소진하고 있는 모습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네 탓'만 하다보니 갈등이 통합조정 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 증폭되기까지 합니다.

 

일차적 책임은 지도층이

이런 우리사회 모습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사회지도층, 특히 정치권에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갈등과 분열을 가라앉히고 다양한 이해관계의 조정의 물꼬를 열어줘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갈등조장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 내고 키우는 일'이라 했습니다. 정치를 당리당략에 따른 정쟁과 권력잡기로만 이해하는 몰지각한 정치 모리배들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가졌고, 힘있고, 잘난 사회적 강자들이 제 잇속에 눈멀어, 지금 갖고 있는 것도 모자란다고, 더 먹어야 되겠다고 다투고 힘을 부리니, 힘없고 부족한 약자들은 그저 황망할 따름입니다. 공공(公共)이 사사(私事)에 묻혀버리는 사회는 자멸한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의 교훈입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니라면 그 사회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고대 중국의 성현 노자는 도덕경에서 '낳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일을 하지만 뽐내지 않으며, 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 것을 일러 현묘한 덕이라 한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고 갈파합니다. 이런 뜻이 오늘날에도 조금이나마 살아있다면, 이런 리더십이 우리사회에 조금이나마 작동한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까. 이런 기대 또한 황망하긴 합니다.

 

국민의 아픔을 아는가

이 글을 쓰려고 자료철을 뒤적이다 보니, 꽤 오래 전 이야기지만, 이런 기사가 눈에 띄더군요.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 주인이 가게 손님 한명당 3000원씩을 따로 모아 8년 동안 4억여원을 불우이웃 치료에 써달라며 서울대 병원에 기부했다는 이야깁니다. 98년부터 거의 매년 수 천만 원씩을 내놓아, 그때까지 4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니, 일시적이거나 과시적 행위는 아닌 듯 합니다.

더구나 서울대병원의 불우환자 바자 때도 1000만원 상당의 초밥을 기증하고, 인근 노인들을 매달 8차례나 자신의 가게로 초청해 점심을 제공해 왔다고 합니다. 유년을 어렵게 보냈다는 그는 "병이 나도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서러움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라 했다지요. 아파봤으니 중생이요, '중생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는 불교의 유마거사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아파보지 못한 사람, 삶의 쓴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공직에 나설 수 없다는 법을 만들면 어떨까 라는 희한한 생각마저 듭니다.

 

간디의 7대 사회악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 불살생 무소유 같은 꿈같은 소리를 초석으로 결국 인도의 독립을 이룩해 낸 위대한 영혼입니다. 그는 자신이 발행하는 영문 주간지 영 인디아’19251022일자에 그가 본 사회악 7 가지를 소개합니다. 간디의 7대 사회악은 원칙 없는 정치 도덕성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개성을 존중치 않는 교육 인간성이 사라진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입니다. 7대 악을 현재 우리사회에 대어보니, 어쩌면 간디가 100년 후 대한민국을 미리 내다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정치 경제 노동 교육 신앙 등 어찌 그리 정확히 우리 꼴을 짚어냈을까요. 필자가 우리사회를 지나친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한편으로는 간디의 세상 평가 기준이 지나치게 높은 탓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악이 없는 세상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그렇게라도 자위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이상과 현실은 동반자

간디의 지고지순한 비전은 현실적 차원에서는 참 이룩되기 어려운 경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원초적 한계입니다. 인도 독립을 이뤄낸 간디도 독립 조국의 종교적 갈등 와중에서 동족의 흉탄에 죽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늘 아득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이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겨레도 이상과 존엄의 기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진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의 우리를 이룩해 냈습니다. 필자가 세상을 다소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저변에는 우리의 이런 저력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희망의 끈은 굵고도 튼튼하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근본은 결국 사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귀한 삶의 성찰을 보여준 고() 신영복 교수가 생전 정년퇴임 고별강연에서 하신 말씀이 뇌리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사회의 경제적 구조와 정치적 주체성, 문화적 자존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우리사회의 가장 근본인 '사람'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비판적 담론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으며 인간의 애정이 함께 담겨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나무야 나무야' 머릿글에 이런 말을 적어뒀더군요.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간다.” 약삭빠르고 자기 셈에만 골몰하는 '잘났지만 딱한 이'보다는 차라리 '우직함을 지닌 어리석은 약자' 말입니다.



지역 칼럼
  • 이전
    이전기사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