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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 마당>

20210316일 (화) 09:5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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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미있는 우리말 - 사돈(査頓)

 

사돈(査頓)’우리나라에서만 쓰는 말로서 그 유래가 재미있다. 고려 예종 때 여진족을 물리친 원수(元首)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양가의 자녀가 혼인을 맺은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어느 날 윤관의 집 술이 익자 오연총이 생각난 윤관이 술을 들고 시냇가에 당도했는데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저쪽 냇가를 보니 오연총 역시 하인에게 뭔가를 들려서 내를 건너올 작정인 것 같았다. 그 또한 술을 가지고 윤관의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이에 윤관이 대감이 내게 한 잔 들라고 하면 내가 가져온 술을 대감의 술로 알고 마시고, 내가 권하면 대감 또한 갖고 계신 술을 내 술로 알고 드시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잡수시오.” 하면 돈수(頓首 :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함)하고 자기의 술을 먹곤 하였다.

이 얘기가 항간에 돌아 서로 자녀를 혼인시키는 것을 우리도 사돈(査頓 : 나무 등걸에서 절하기)을 해볼까?” 하는 말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좁게는 혼인한 두 집안의 부모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며, 넓게는 혼인 관계로 맺어진 일가친척 간을 일컫는 말이다. 신랑 신부의 아버지를 바깥사돈, 어머니를 안사돈이라 한다.

 

 

2.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약속 장소에 미리 와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은 조마조마하고 손에는 자꾸만 땀이 밴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마다 온통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너의 몸짓이 되어 다가온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하나하나는 분명히 너였어야 하는데……. 틀림없이 너일 것이었는데……. 문이 닫힐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안 오는 것은 아닐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못 오는 것은 아닐까.’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는 것보다 아득히 먼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건 오직 내 사랑뿐!

 

 

3. 조개 껍질 묶어

 

1970년 봄에 경희대에서 신문방송학과 신입생환영회가 열렸다. 초대가수 윤형주는 그 자리에서 신문방송학과 학생으로서 노래를 불렀던 김세환을 처음 만났다. 윤형주는 그해 여름,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해수욕장에서 김세환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윤형주는 친구들과 놀러 왔고, 김세환은 가족들과 함께 왔다.

결혼하기 전이었던 윤형주와 친구들은 파트너를 찾으러 해변에 나온 터였다. 윤형주는 동생으로 삼은 김세환에게 메모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시켰다. 메모에는 트윈폴리오 윤형주입니다. 별장에 초대해도 될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김세환이 메모를 가지고 여학생들에게 다가갔다. 김세환이 말을 거는데 뒤에서 남자들이 다가왔다. 여학생들과 함께 온 일행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번에는 윤형주가 직접 나서서 여대생 네 명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윤형주입니다.”

그들은 금세 윤형주를 알아봤다. 자연스레 별장에 초대했고 여대생들이 응했다. 윤형주는 자신이 초대했으니 잘 해줘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혼자 대천시장에 가서 고기와 찬거리를 사는 등 정성껏 장을 봤다.

그러나 막상 별장에 돌아오니 달갑지 않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윤형주를 포함하여 남자 다섯 여자 넷이었는데 윤형주가 없는 사이 자기들끼리 이미 짝을 정한 것이다. 윤형주는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을 불러 말했다.

, 파트너를 이미 다 정해놓으면 나는 뭐냐?”

친구들이 천연덕스레 답했다.

넌 리더잖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리더로서의 일은 더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여대생 둘이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다른 둘은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 둘이 집에 가야겠다는 친구 둘을 말려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때 윤형주가 나서서 말했다.

이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들만의 노래를 만들게요. 그 노래가 마음에 들면 떠나지 마세요.”

모두 동의했다.

그 길로 윤형주는 방에 들어가 노래를 만들었다. 해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소재들로 가사를 썼다. 밤은 깊어가나 잠이 오지 않는 여름 밤, 밤새 모기가 물어도 그저 즐거운 모임, 김치만 있어도 맛있는 아침 식사. 가사는 썼는데 오선지가 없었다. 김세환과 친구들이 부랴부랴 빈 종이에 오선지를 그려줬다. 30분 만에 작곡과 작사를 끝냈다. 지금은 '조개 껍질 묶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곡, '라라라'였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김세환이 , 진짜 좋다.”라며 박수를 쳤다. 여학생들도 좋아했다. 당연히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듬해 노래를 발표했다. 김세환과 함께 만든 앨범에 실렸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후 해수욕장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여름 노래로 남았고, 2005년에는 보령시장 주도로 대천해수욕장에 라라라노래비가 세워졌다.

 

 

4. 역사를 만든 인연들

 

다산 정약용보다 24세 연하였던 추사 김정희는 아버지를 만나러 평양에 갔다가 평안감사에게 선물로 받은 수선화를 고려자기에 심어 정약용에게 보냈다. 다산을 존경했던 추사는 스승 박제가와 친분이 있는 중국의 대학자 완원과 사제지간을 맺고 자신의 별호를 완당이라 칭하였다. 박제가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글씨 쓰기를 좋아해서 항상 입에 붓을 물고 있었다. 화장실에서는 모래에 글씨를 썼고, 앉기만 하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학문에 몰두했다. 1780년에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은 실학자 박제가의 스승이었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1866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행패를 부릴 때 평안감사로 사건 현장을 지휘하고 보고서를 올렸다.

역관으로서 중국을 왕래하며 신문물을 많이 접했던 오경석은 개화사상가 박규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위창 오세창은 1864년에 오경석의 맏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오세창은 31운동을 주도했던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다. 만해 한용운은 1916년 위창의 집을 방문하여 오세창이 수집하고 정리한 고서화를 감상한 후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마다 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한자리를 차지할 만하다.”라고 극찬했다. 한용운은 31운동을 이끈 중심이었고 주역이었다.

1936년에 재혼한 한용운이 단칸방에서 궁색하게 신혼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본 지인들이 성북동에 거처를 마련해주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벽산 스님은 집을 지으려고 사 두었던 땅을 선뜻 내주었다.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홍순필, 박광 등이 돈을 모으고, 모자라는 것은 금융조합에서 빌려서 집을 짓게 되었다.

만해 한용운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던 계초 방응모는 백석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후원하였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시를 조선일보에 발표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아 1,000억 원대에 달하는 건물과 땅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였다. 최고급 요정 대원각이 있었던 자리에 세운 길상사의 개원 법회가 열리던 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법정 스님을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1933년 일본에서 유학할 때 백석의 거주지는 동경의 길상사 1875번지였다. 백석의 하숙집이었던 길상사를 기억하고 있던 김영한은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면서 이름을 길상사로 짓게 된다. 19991114일 세상을 떠난 그녀의 유골은 유언대로 첫눈 내리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다.

19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김지하 시인은 1973년 봄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에 가수이며 작곡가인 김민기는 대학 선배 김지하의 시 <금관의 예수>에 곡을 붙이고 직접 노래하였다. 1970년대에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 아침 이슬상록수를 부른 가수가 바로 양희은이다. 가수 윤형주는 둘은 특히 같이 음악할 때 더할 나위 없는 조화를 보였다. 보통 김민기가 반주하고 양희은이 노래했다. 김민기의 탄탄한 기타 주법으로 양희은의 노래는 생명력을 얻었다. 김민기가 만든 노래를 양희은이 부를 경우엔 노래의 설득력이 힘을 더했다.”라고 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는 1945216일 오전 336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절명했다. 윤동주가 옥사했다는 전보를 받은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은 시신을 찾으러 후쿠오카 형무소로 떠났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조카 윤동주의 시신을 인수해 나온 윤영춘은 가수 윤형주의 아버지이다. 시인 윤동주의 6촌동생인 윤형주는 아버지가 전해 준 윤동주의 시에 감동 받아 시를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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