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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마당>

20210409일 (금) 13:2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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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든 인연들

 

고려시대 최영 장군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316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최영은 열여섯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열여덟의 나이에 왜구 토벌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최영은 원나라가 빼앗아 쌍성총관부를 두고 통치해 오던 지역을 공민왕 5(1356)에 고려가 되찾는 과정에서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성계는 1363년에 여진족을 토벌할 때 종사관으로 참전한 포은 정몽주를 만나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포은 정몽주는 133712월에 경상북도 영일현(지금의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재주가 뛰어나 시도 잘 짓고 글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아홉 살 되던 해 여름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갔을 때 계집종이 정몽주에게 청을 하였다. 계집종은 집을 떠나 멀리 나가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대신 써 달라고 부탁했다.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글을 알지 못하여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몽주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계집종의 심정을 글로 적어 주었다.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둥글게 되었다가 이지러지지마는

나의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계집종은 남녀 사이의 애틋한 사연을 짧은 글 속에 멋지게 나타낸 정몽주의 글재주에 탄복하였다. 하지만 글이 너무 짧아 아쉬움을 느꼈다. 좀 더 길게 써 달라고 다시 부탁하자 정몽주는 씩 웃으며 다음과 같이 덧붙여주었다.

 

봉하였다가 다시 뜯어 한마디를 더 씁니다. 세상에 병이 많다지만 당신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 하는 병보다 더한 병은 없는가 봅니다.

 

겨우 아홉 살밖에 안 된 소년의 뛰어난 감성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에는 정몽주가 풍부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임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봄비가 가늘어서 방울도 짓지 못하더니

한밤중에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눈 녹아 남쪽 시내에 물이 불어나니

새싹들이 많이도 돋아났겠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의 <봄비>라는 작품이다. 봄비는 너무나 가늘어서 마치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처럼 사각사각 내린다. 비를 맞아도 옷이 젖는 줄을 모른다. …… 가만있자. 아까부터 자꾸만 무슨 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오는 것만 같다. 시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무슨 소릴까? 창밖에 제법 빗줄기가 굵어지는 모양이다. 지붕 위로 처마 끝으로 빗방울이 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면 혹시 온종일 내린 보슬비가 산속에 쌓인 눈을 녹여서 시냇물이 불어난 걸까? …… 시인은 방 안에 앉아서 소리를 따라 생각에 잠긴다. 산속 깊은 곳에 쌓인 눈도 이제 녹기 시작하겠구나. 깊은 산속에는 지금쯤 새싹들이 언 땅 위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겠지. 이 밤 봄비를 맞으며 겨우내 언 몸들을 녹이고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시인은 한없이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에서

 

1354, 정몽주의 나이 열여덟 살 때 아버지 정운관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장례를 치른 날부터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살아 계신 아버지를 모시듯이 정성을 다하는 정몽주의 효성은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공민왕은 정몽주를 표창하고 그의 지극한 효성을 길이 기리게 하였다. 대단한 효자라는 평판이 난 정몽주는 1360년 문과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관직에 올라 조정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널리 칭송받은 정몽주의 용기

1362년 포은이 존경하던 스승 김득배가 홍건적 토벌에 공훈을 세우고도 권신 김용의 미움을 받아 처형되어 머리와 시체가 거리에 널려졌다. 모두 김용이 무서워 돌보려 하지 않았는데, 정몽주는 죽을 각오를 하고 국왕에게 스승의 무죄를 호소하며 스승을 장사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진심을 토로하는 정몽주에게 끌린 왕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포은은 스승의 고향에 정성껏 유해를 매장했는데, 훗날 김용이 반역을 꾀하다 죽임을 당하자 정몽주의 용기는 널리 칭송받았다.

1368년 중국에서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자 조정 신하들은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정몽주는 원나라와 관계를 끊지 않으면 강력한 힘을 지닌 명나라의 공격을 받아 고려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였다. 친명파에 속해 있었던 포은은 1372년 공민왕이 명에 파견하는 사절단으로 수도인 난징에 가서 주원장을 만났다. 정사 홍사범과 서장관(서기관) 정몽주는 명나라에 머물면서 외교적인 문제를 협의하고 매듭지었다.

이듬해에 사신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다가 태풍을 만났다. 폭풍우와 함께 산더미 같은 파도가 휘몰아치면서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정몽주는 부서진 뱃조각에 매달려 바다를 떠다니다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해초와 풀뿌리, 나무 열매와 나무껍질 등으로 목숨을 이어가다가 명나라 상선을 만나 살아 돌아왔다. 정몽주는 표류한 지 13일 만에 구조되었지만 같은 배에 타고 있던 고려인 11명은 모두 익사하였다.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속에서도 국교 문서만은 품에 꼭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크게 감동 받은 주원장은 정몽주를 다시 난징으로 데려와 성대히 대우하고 몸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 귀국시켰다.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신 황진이

조선시대 세종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였던 고불 맹사성을 1421년에 우의정에 임명하였고, 1431년에는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맹사성의 오랜 벗이며 동료 정승이었던 황희는 세종 15년에 김종서를 함길도 절제사로 천거했고, 뒷날 우의정으로 추천했다. 문종 1년에 우의정으로 승진한 김종서는 문종이 임종하면서 당부한 대로 단종을 보좌하다가 수양대군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1455611일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의 손자가 바로 성종이고, 성종의 둘째 아들이 중종이다.

화담 서경덕은 중종 26(1531)에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이 1544년 화담을 후릉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개성에 머물렀다. 황진이는 유일하게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서경덕의 인품에 반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황진이는 미모와 기예가 뛰어난 기생으로 명성이 자자해서 많은 풍류객이 서울에서 개성까지 오르내릴 정도였다. 종친 벽계수가 황진이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를 즐기는 명사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 이달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은 황진이의 집 근처 누각에 올라 거문고를 켜다가 황진이가 나타나면 본체만체하고 가라고 일러주었지만 벽계수는 자신을 뒤따라오던 황진이가 고운 음성으로 시조를 읊자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허균

허난설헌과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 옥봉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홍랑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랑은 선조 때 함경남도 홍원의 이름난 기생이며 여류시인이었다.

최경창은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3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파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던 그의 관직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15796, 고죽이 종성부사에 임명되자 대관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평소에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선조는 3개월이 지날 때까지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권을 세우기 위해 붕당을 활용했던 선조는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공을 인정하여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촌은 유희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계랑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 두 사람은 곧 이별을 하게 된다. 부안의 명기 계랑은 유희경과 헤어진 뒤에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당대 최고의 문장가 허균을 만나 10년 동안 시를 주고받았다.

우리나라의 여류시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칭송을 받는 허난설헌은 스물일곱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했다. 허난설헌이 죽은 이듬해인 1590년에 동생 허균은 친정에 남아 있던 시와 자기가 외우고 있던 시들을 모아서 난설헌집의 초고를 펴냈다. 1606년에는 조선에 온 사신 주지번이 허균에게 부탁하여 받은 허난설헌의 시집을 명나라에 가져가 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그 시집은 크게 환영을 받아 중국에서 최초의 한류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허난설헌의 문학적 성취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던 허균은 1618, 반역을 계획했다는 죄로 처형된다.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허균을 즉각 처형하라고 주장했던 이이첨은 161612월에 자신의 횡포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제출한 윤선도를 제 분수도 모르고 불충한 생각을 하는 죄인으로 몰아 북쪽 국경 지방인 경원으로 유배 보냈다.

시조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 다산 정약용의 6대 외조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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