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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잘 사는 법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20210423일 (금) 11: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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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게사는 세상이요~

사람은 다들 잘 살고 싶어하지만, 사실 ‘잘 살기’라는 게 참 쉽지 않다. 이리하면 잘 살 것같아서 그리 했는데, 결과는 영 엉뚱하게 나오는 게 우리네 삶이다. 운명일 수도 있고, 본인의 불찰일 수도 있다. 인생의 모든 고민과 딜레마가 어쩌면 ‘잘 살다’는 이 한마디에 다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걸 두고 동서고금의 온갖 인생법칙과 지혜와 덕담과 방법론이 나왔고, 지금도 사람들은 부단히 이를 부여잡고 끙끙대고 있다. 
그런데 그 숱한 선현들의 인생안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도 끙끙대고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늘 변하기 때문이고, 나도 늘 변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하면 인생문제도 새로이 등장하고, 새로 등장한 문제의 해답은 과거의 지혜로는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는다. 더욱이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인 만큼 너의 답이 나의 정답으로 쉽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인생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산다. 다만 가족 이웃 친지는 서로 돕고 격려하고 지지하는 존재지, 내 인생을 살아주는 존재는 아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 정신못차릴 정도로 늘 변하는 세상에서. 그것도 나만의 세상에서 말이다. 

세상도 늘 변하고 나도 변한다

그래서 서점에는 자아계발서, 성공학 책, 너는 이렇게 살아라 따위의 책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그 책 읽는다고 다 성공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나 때는 말이야, 이리이리 해서 다 해결했어. 그 간단한 걸 너는 왜 못하니. 그러면 당장 말이 튀어 나온다. 아버지는 저를 잘 몰라요. 제 말을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렇다. 문제가 달라지면 답도 당연히 다르다. 나의 문제는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답도 아니고, 다만 참고할 뿐인데, 그 참고가 큰 도움이 되면 그걸 운이 좋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게 공감과 소통이 어려운 이유다.
그래도 인터넷과 도서관에 쌓인 지혜의 말씀들을 자주 접하다 보면 동서고금을 두루 꿰는 공통된 그 무엇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세상은 쉽게 달라져도 인간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간도 생로병사를 아파했고, 오늘의 인간도 성공과 실패에 울고 웃는다. 물론 미래의 인간은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 인공지능과 인공장기를 달고, 그걸 부단히 교체하면서 영생을 누릴 신인류가 나타날지도 모르고, 반대로 핵전쟁이나 환경오염, 지구온난화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멸종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몇몇 똑똑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이 자기네들만 광속의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을 찾아갈지도 모르지만, 그런 곳을 찾았다고 해서 인생의 근본문제가 다 풀리고 천국이 도래할까. 모를 일이다.

좋은 인성이 좋지않나

암튼 오늘은 오늘 문제에 집중하자. 그래서 그 많은 인생론 설교에 공통적으로 담긴 메시지가 있다면 그게 뭘까. 필자의 얕은 소견으로는 ‘인성(人性)’이라는 한 단어가 떠오른다.  인성이란 그 인간의 성품을 말한다. 잘 살려면 좋은 인성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좋은 인성이란 성공에 적합한 인성, 즉 긍정적 마인드, 목표의식, 강한 멘탈, 자제력, 실패를 극복하는 힘, 자신감, 온화함, 열정, 용기, 부지런함 따위를 일컫는 말이겠다. 그래서 인성의 씨앗을 심어 운명을 수확하라는 멋진 말도 나온다. 
그러니 잘 살려면 이런 인성을 함양하라, 뭐 이런 말이 되겠다. 사실 이를 달리 말하면 부모가 부자라서, 머리가 좋아서, 좋은 학교를 나와서, 인맥이 좋아서 등등은 잘살기의 핵심은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물론 부모가 부자고 머리가 좋으면 대개의 경우 잘 살 가능성이 상당히 커지긴 한다. 그러나 부모가 가난하고,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다 못산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잘살기는 조건보다는 인성이 더 결정적이라는 말이겠다. 
부자든 똑똑하든 인성이 나쁘면 당연 잘 못 살 것이다. 당장은 몰라도 결국에는 그러리라. 인성이 안 좋다면 오히려 돈이나 지능이 성공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게 삶의 아이러니다. 그러니 부모 원망은 말자. 원망 잘하는 성격은 성공에 부적합한 인성이다. 부모 인생이 내 인생은 아니다. 

성공과 멘탈리티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인성 인성 하니까 혹 이를 사람좋다, 착하다는 말로만 이해하진 않았으면 한다. 인성 더러운 놈도 성공하고, 착한 사람도 못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여기서 인성이란 함은 성공에 적합한 인성, 즉 앞서 말한 긍정성, 자신감, 강한 멘탈, 온화함, 자제력 등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이런 성품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대개 잘 살고, 또 계속 잘 살더라는 예기다. 그러고 보니, 성공이 꼭 잘 사는 건 아니다. 물론 실패는 좋은 게 아니다. 그러나 성공을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나 이름을 얻고, 좋은 가정 일구고 따위만을 가리킨다면 성공하고도 잘 못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성공은 자신이 목표한 바를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뜻한 바가 뜻대로 되는 것. 돈 벌려 했다면 돈 많이 번 게 성공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었다면 높은 자리에 간 게 성공인 건 분명하다. 그런데 고결한 성직자가 되려 했다면 가난하고 외로워도 그리 되는 게 성공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솜씨 좋은 목수가 되려했다면 그리 된 게 성공이다. 돈이나 지위는 따라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성공하려면 좋은 인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도 이 모두에 적용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이 되건 뜻한 바를 이루는 게 성공이라면, 그게 잘 사는 거고, 그런 성공을 위해서는 성공에 필요한 인성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다. 

생명의 자아실현

긍정성, 적극성, 포용성 따위의 성품이 왜 성공, 잘살기의 포인트가 될까. 이는 사실 건강한 생명력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잘 산다는 건 생명력이 왕성하다, 살맛이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 잘 살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개별 차원으로 보면 자아실현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자아는 여러 측면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뜻한 바, 그리 되고 싶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마음이 잘 살려는 마음이고, 그게 이룩되면 자아가 실현된 것이고, 자아가 실현되면 잘 살고 있다는 느낌과 믿음이 생기기 마련 아니겠는가. 내가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라는 느낌과 믿음이 바로 성공의 바로미터이자, 행복의 열쇠다. 
나는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었는데, 아버지 말씀을 쫓아 증권맨이 되어, 노력 끝에 돈은 괘 벌었지만 그다지 행복하진 않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등은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지 않는가. 나의 뜻한 바가 아니고, 나의 자아실현이 아니라 성공했다는 느낌이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래서 그닥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삶들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그때도 용기라는 인성을 잘 발휘하면 얼마든지 새 삶을 구릴 수도 있다.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돈을 좀 모아뒀으니, 하고픈 일 하기가 돈없는 젊을 때보다 더 용이할 수도 있잖은가. 여기서 관건은 도전이라는 인성이다. 안주하지 않는 열정이다. 그러니 잘살려면 인성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다시 확인된다. 

길러지는 성품

그러면 어떡해야 좋은 인성을 갖게 될까. 타고나는 걸까. 길러지는 걸까.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타고나기도 하고 길러지기도 한다. 타고난 사람은 논외로 하자. 모차르트의 재능을 노력으로 이길 순 없다. 영화 아마데우스 내용을 사실이라 한다면 몰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천재를 희망하고 시기하다가 되레 자신의 인생만 망쳤다. 좋은 인성은 그런 분별을 잘 한다. 그런데 모짜르트같은 하늘이 낸 천재가 아닌, 평범한 천재야 노력으로 상당히 따라갈 수 있으니,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좋은 인성을 기르는 일이다. 초등학교 교훈들 상당수가 인성교육을 표방한다. 전인교육이다. 난사람, 든사람보다는 된사람을 만들자는 얘긴데, 사실 교육현장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으니 교훈으로 내세웠겠지만. 
학교교육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힘으로 좋은 인성을 함양해야 한다. 그래야 잘 산다 는 말이다. 잘 살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데, 잘 살기 싫은 사람 만나기는 별따기보다 어렵다. 잘 살고 싶음은 생명의 본령이요, 인간의 본능이다. 
암튼,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냐구. 필자는 한마디로 ‘공부하자’고 권한다. 글자공부, 지식공부 말고, 마음공부, 세상공부, 사람공부 말이다. 보통 이를 인문학이라 하는데, 대학에서 하는 인문학 공도 좋지만, 혼자서 또는 맘 맞는 사람 몇몇 모여 하는 평생공부도 좋겠다. 물론 그러기가 쉽진 않은데, 일단 혼자서라도 시작해보자. 공부꺼리는 얼마든지 널렸다. 꼭 어렵고 딱딱한 책이 아니라도, 소설 읽고 시도 몇 편 외우고, 영화도 감상하고, 대화 커뮤니티도 만들어보고, 등등.

평생토록 한결같이

물론 우리 풍토에 이것도 안쉽다. 도반 만나기도 어렵다. 우리 각자도 타인에게 썩 좋은 도반이 못된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르랴, 하는 좋은 심성으로 그 큰 맥은 놓치진 말자. 그러다 보면 기회가 생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공부길엔 특히 더 그렇다. 오래오래 한결같이 하다 보면 성장하고 길러진다. 자식 키우기나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보면 안 크는 것 같아도 오래 한결같이 키우다 보면 어느덧 훌쩍 큰 놈 발견하듯이 말이다. 지식이 쌓여야 지혜가 생기고, 사람이 모여야 새 길이 열린다. 그걸 창의성이니, 창발성이니 그리 말하는데, 다 삶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꼭 세계최고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면 좋지 않은가. 잘 산다는 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말하는 거지, 일확천금을 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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