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정신이 끌리는 곳은 둘이다. 재미와 의미다. 정신이 이들에 끌리는 이유는, 이들을 통해 인간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삶의 동인이다. 재미있거나 의미있어야 살맛이 난다. 둘 다 있으면 더 좋지만 그런 건 드물다. 있어도 잘 감지하질 못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감지되는데, 보통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고 산다.
삶이란 게,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도 해야 하긴 하지만, 이런 일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곧 시시하고 따분해진다. 재미있거나 의미있어야 행복하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재미와 의미를 추구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야기 게임 유머 놀이
먼저 재미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은 언제 어떤 일에 재미를 느끼는가. 대략 이야기, 게임, 유머, 놀이 정도가 사람이 재미를 느끼는 영역이다. 물론 모든 일에서 재미를 느낄 수는 있지만 이는 그 개인의 능력 덕분이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니, 일단 이야기, 게임, 유머, 놀이 정도를 갖고 논의를 진행해보자.
첫째, 게임은 재밌다. 비단 컴퓨터 게임만이 아니라, 동서고금 사람들이 게임이라 부르는 모든 활동은 재밌다. 재밌으니 즐기는 거다. 게임도 크게 보면 놀이의 하나인데, 놀이 중 룰을 정해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를 게임이라 부르자. 승패를 가른다는 차원에서는 삶과 닮아있지만, 룰이 선명하다는 차원에서는 삶과 다르다. 경쟁이 있어야 시합이 된다. 일단 내가 뭘 잘했을 때나, 남이 해놓은 게 잘 한 것같을 때 재미를 느낀다. 게임도 잘 하면 재미있지만, 잘 못하면 재미없다. 방청소도 잘 하면 재밌는데, 이런 일은 금방 싫증을 느낀다. 게임은 변화무쌍한데, 방청소는 뻔해서 그런 거다. 둘 차이의 핵심은 나의 창조성이 얼만큼 개입되느냐,이다. 나의 창조성이 많이 담긴다면 방청소도 얼마든지 재밌게 할 수 있다. 놀이도 마찬가지다. 논다고 다 재미있는 건 아니다. 여러사람이 모여 즐겁게 놀아야, 특히 내가 그 놀이에 잘 녹아들어야 재밌다. 놀이도 삶의 축약판인 것이다.
스토리는 삶이다
게임 말고도 우리가 재미를 많이 느끼는 영역이 옛날 이야기 같은 스토리있는 이야기다.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이 그래서 재밌다. 이야기는 왜 재밌을까. 물론 재미없는 이야기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재밌다고 즐기는 영화를 어떤 이는 따분해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삶의 예화들이다. 이런 삶, 저런 삶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 예시를 통해 사람은 간접경험을 하고 자신의 미래 삶에 직간접적으로 적용시켜 본다. 경험이 쌓이는 건 사람을 안도하게 한다. 긴장이 해소된다. 다음에 내가 이런 경우에 처하더라도 모범 해결책이 있으니 그리 따라 하면 실패가 없을 거야. 야, 좋은 경험했네. 봐, 삶은 그런 거야. 삶의 정체를 그만큼 더 알았으니, 아는 것은 불안하지 않지. 그래서 이야기에는 기본구조가 있는 것이다. 이 플롯이 삶의 진면목을 더 많이 더 감각적으로 전해줄수록 그 이야기는 더 재밌다. 역경과 운명을 극복하는 인간승리 스토리 같은 것 말이다. 인간은 그런 것에 감동한다.
또 이야기는 정체성 폭로에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 본질 따위를 아무리 말해봐야 그건 믿을 게 못된다. 오히려 지나온 과정을 보면 그 정체를 잘 알 수 있다. 그건 속이지 못한다. 저 친구가 자기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는데, 그 말보다는 그 히스토리를 보면 그 친구의 정직성 여부가 더 잘 드러난다. 속지 않을 수 있다. 안도한다는 점에서는 역시 마찬가지다.
멋진 해석의 꿀맛
인간은 그냥 살진 않는다. 보다 더 잘 살려는 한다. 근본욕망이다. 이 근본욕망은 심리적으로는 완결지향으로 나타난다. 인지적으로는, 불완전한 정보를 완전하게 만드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사람은 눈이 녹아가는 자국에서 예수의 얼굴을 발견한다. 불완전 정보를 완벽하게 꾸미려는 인지활동은 해석이라 한다. 사람은 해석이 잘 됐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큰 재미를 느낀다. 해석은 내가 하는 건데, 내가 이런 멋진 해석을 하다니, 나는 참 잘 살고 있는 거야. 물론 앞으로 그럴 게고. 해석하는 재미, 그 해석이 멋지게 느껴지면 그만큼 더 큰 재미. 해석에는 어차피 창조가 개입되고, 그렇다면 창조 또한 재미다.
사실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정보에는 빈틈이 있다. 빈틈이 절대적으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빈틈을 느낀다. 빈틈이 있어야 내 해석이 개입되고 그래야 재미가 있다. 친구라도 빈틈이 없어 보이는 친구는 재미없다. 잘난 체 하고 성질 까칠한 놈이 뭔 재미있겠는가.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데, 그럼 내가 없어지는데, 뭔 재미가 날까. 소통이 안된다.
소통은 최소한의 공감이 전제돼야 한다. 논리는 그 최소한도 못 감당한다. 이야기는 논리가 아니기에, 나의 감성, 나의 해석이 들어갈 틈이 있기에 그 최소한을 확보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가 풍요로운 사람을 재밌는 사람이라 여긴다.
사람들이 재밌어 하는 흉내내기나 성대모사도 그렇다. 비슷하면 그만큼 동일성을 확보한다. 아, 그게 알고 보니 그런 거구나. 이제 그걸 알겠네. 어쩌면 저렇게 그 정체를 잘 폭로할까. 이제 두려워할 게 없잖아. 그런데 어차피 흉내내기는 흉내내기다. 빈틈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헐렁한 정신
게임이나 이야기도 재밌지만 유머도 재밌다. 재밌는 이야기를 유머라 한다. 유머의 재미는 뭘까. 게임의 재미나 이야기의 재미와 크게 다르진 않지만, 유머만의 특성은 있다. 뒤집어 보기. 반전 같은 것들이다. 유머는 헐렁헐렁한 정신이다. 그래서 조급함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이다. 불안하면 창조는 고사하고 시야가 좁아져 상황파악도 잘 안 된다. 그럴수록 더 불안해진다. 악순환이다.
이 불안의 압박감에 짓눌려 웃음 자체를 억압하다가 비극을 초래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숀 코네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나와 있다. 책도 영화도 재밌다. 긴장은 풀어야지 감싸맬 게 아니다.‘웃음의 철학’이라는 책도 있는데, 서양사상사에서 웃음, 유머, 풍자, 해학 등을 어떻게 이해해왔나를 다룬 책이다. 재미는 없다. 마치 이 글처럼. 그래도 관심있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
의미는 부여하는 것
한편, 재미라는 게 이러하다면, 의미란 건 뭘까. 의미란 내가 사람이나 사건이나 사물에 부여한 가치다. 가치란 정보처리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원칙이다. 숱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느 정보부터 처리해야 생존에 유리할까. 그 순서를 정하는 어떤 기준이나 원칙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소중한 것부터 처리하는 게 맞다.
내게 소중한 게 의미있는 것이고, 그렇게 효율적으로 정보를 갈무리하면 내 삶의 전망이 밝아서 안도한다. 잘 살고 있고, 잘 살 꺼니까. 그래서 삶이 뿌듯해진다.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해서 불행하다.
의미라는 게 내가 대상에 부여한 가치라고 한다면, 그 가치는 어떻게 부여될까. 그 대상이 진짜로 그런 가치를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 눈에 그리 보이는 걸까. 사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가치가 형성된다 할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 보자. 그녀가 이쁜 건 진짜 그녀가 이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눈에 그리 보이는 걸까. 내 눈과 그녀 사이 어디쯤에서 그리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말이다. 그래서 좋은 의미부여를 잘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모든 게 의미있어 보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것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지나친 의미부여는 거짓말보다 나쁘다’는 인디언 속담도 있다.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 적당한 게 좋다. 그렇지만 요새 우리 삶이 너무 의미부여에 쩨쩨하다 보니, 안타까울 때가 많다.
열린 공동체
암튼, 우리는 이렇게 재미와 의미 그 사이 어디쯤에서 정신의 지향을 두고 산다. 재미와 의미는 정신이 지향하는 행로의 양 대척점에 있다 하겠다. 재미는 정신에너지가 바깥으로 향한다면, 의미는 그게 안으로 향한다 하겠다.
재미와 의미가 이러하다면, 재미와 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로 사는 게 좋을까. 재미는 창조하는 거고, 의미는 부여하는 거다. 물론 방향만 다르지 창조와 부여는 같은 말이다. 그러니 창조하고 부여하는 자세로 사는 게 살맛나는 삶을 구가하기에 참 좋다. 그런 안목을 기르기에 힘을 쏟았으면. 그 안목을 달리 말하면 사랑인데, 누가 그랬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그런데 반대도 맞다. 보이면 사랑한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나의 재미와 의미가 내가 사는 공동체에서는 어떤 재미와 의미가 되는가도 염두에 두면 더 좋다. 그래야 오래 지속되는 진짜 재미와 의미가 생긴다. 자신만 생각하는 자기애는 결국 자신마저도 못 지킨다. 닫힌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연민도 아니다. 집착일 뿐이다. 열린 사랑만이 오늘을 살 수 있다. 과거에 대한 회한도 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이.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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