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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한류, 우리 게 좋은 것, 그럼 전통은

20210730일 (금) 10:59 입력 20210730일 (금) 10: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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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지구촌에 한류바람이 불고 있다. 대략 한 20년 전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언뜻언뜻 일기 시작한 이 바람이 오늘날처럼 글로벌 강풍 열풍이 될 줄은 우리도 미처 몰랐다. 초기에 그 지속성이나 파급력을 두고 희망섞인 전망들은 있었지만, 그게 “우리 게 좋은 것이야”라며 우리끼리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 바람을 이어가기 위해 그동안 우리 문화계는 신명을 다했고, 정부도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공장에서 만드는 상품과는 달리 문화라는 건 열심히 한다고 공감을 얻는 건 아니다. 물론 반도체 자동차 선박 가전 등 공산품 수출을 통한 나라 이미지 제고도 그 바람이 부는 데 한몫을 했겠지만, 한류바람은 분명 그 고유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리라. 그게 뭘까. 한마디로 ‘한국적인 정서’라 뭉뚱거려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필자의 능력 밖이다. 전문가들도 여러 측면을 거론한다. 한(恨)이라는 고유정서도 있고, 떼창을 부를 수 있는 대동정신도 있고, 인류 보편적 삶을 내재화하는 문화 테크닉적 역량 덕도 있고, 우리민족의 원형질에 새겨져 있는 맛과 멋도 있고, 우리 고유의 심미안과 미학적 감수성도 있고 등등. 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얘기들이다. 필자는 이런 콘텐츠 관련 이야기를 할 깜냥은 못된다. 다만, 한류와 우리 전통과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조금 거들어 보고자 한다. 우리 고유의 정서가 인류보편성으로 연결되는 걸 한류라 하겠는데, 그 고유의 정서는 전통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류라는 계기를 통한 전통에 대한 재인식은 한류의 지속적 확장과 진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전통이 단절되는 혼란
전통이란 게 그렇다. 과거 조상들이 살아온 모든 문화적 가치들 가운데 아직 유무형으로 살아 현재도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들이다. 오늘 우리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현재의 삶에서도 의식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말이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성향과 기질에 부합한다는 말이요,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삶에 적극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한다면 그 전통은 유통기한이 다 된 것이다. 이렇듯 전통이란 민족공동체의 삶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것이다. 그 흐름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읽는다.
그런데 우리는 불과 백 여 년 전에 민족사 초유라 할 전통의 크나큰 단절을 겪었다. 돌아보면 이러하다. 근대화라는 글로벌 흐름을 놓쳐, 외세의 침략 앞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나라를 잃는 치욕을 맛본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우고, 민족 자체를 말살시키려 획책했다. 말과 글을 못쓰게 하고 이름까지 바꾸라 했다. 역사를 왜곡하고 전통을 멸절시켰다. 그래도 민족 정기는 살아있어, 해방을 맞이하는가 싶었지만, 자력갱생이 아니었던 탓에 우리는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질곡의 시간들은 길고도 아팠다. 그래도 우리는 저력의 민족 아닌가. “잘 살아 보세” 뒤늦게나마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온 국민이 합심단결하여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해 나간다. 어언 70년, 이제 우리는 유엔이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고, 국제무대에서 위상을 떨치며, 인류사회를 선도할 비전을 열어가고 있다. 필자는 한류도 이런 큰 흐름에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제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한국적 근대화’에 일단 성공한 것이다. 새로운 사회체제와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진통은 항상 있지만, 민족의 지혜는 갈등을 창조의 계기로 만들 것을 필자는 믿는다. 지난 시간들이 이를 증명한다.  
  
근대화와 전통
그런데 근대화란 무엇인가. 사람들간에 일치된 정의야 없지만, 대략 두 갈래로 대별된다. 하나는 경제사적 관점으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런 근대화는 거의 서구화를 말한다. 보다 보편적 개념으로는 후진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일컫는데, 이는 전통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이해된다. 둘을 묶어 이야기하면, 일반적으로 서구화 공업화 민주화 합리화 도시화 개인화 등의 말을 들을 때 연상되는 상태, 그 언저리를 말한다 하겠다. 
우리는 이런 사회발전 단계를 스스로 실현하지 못하고, 외세의 강압에 의해 매우 왜곡되고 한정적인 형태로 겪는다. 더욱이 나라를 잃은 게 전통의 무지와 무능 탓으로 여겨, 외세의 선동과는 별도로 스스로도 전통을 외면 부정하고 단절시킨다. 유학 특히 주자학을 중추로 한 유교문화가 그 타깃이었다. 스스로 자기정체성의 상당부분을 부정하다 보니, 문화적 아노미로 오랜 시간 방황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우리는 질곡의 시간을 산고의 시간으로 승화시켰다. 일단 먹고 살 만 해졌다. 생존의 위협을 벗어나니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찾기 시작한다. 외면했던 전통도 다시 뒤적거려 보고, 우리 게 좋은 것이라 외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한 귀결이 한류다. 방탄소년단은 고사하고 이날치의 범내려온다는 사설이 호응을 얻으리라고는 누가 짐작했겠는가. 그러고 보니 수궁가 등 판소리 사설이 베르디의 오페라보다 못할 게 무엇이며, 근대화의 표본인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춘향전이 있다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게 아니라 나는 나라는 자신감이다. 

전통을 대하는 자세들
그렇다면 이제 전통은 어찌되나. 우리는 전통을 잘 전승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전통이 삶과 세상에 큰울림을 줄 수 있을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근대화와 관련해 전통을 대하는 자세는 대략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전통’은 일단 유학을 위시한 동양철학적 사유, 그 세계관과 가치관 등에 한정시켜 생각해 보자. 그 전통적 가치가 우리 근대화에 가장 큰 걸림돌로 낙인찍혀 온 전력 때문이다. 전통에 대한 입장은 동양사상에 대한 입장과 상당히 겹친다.)  
첫째, 무관심형이다. “공자님 말씀, 난 별 관심없어. 뭐 좋은 말씀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봤자 케케묵은 소리 아닌가. 미래를 그리며 열심히 살면 됐지, 곰팡내나는 옛날 책 뒤져서 뭐 어쩔려구. 세상은 팽팽 돌아가고 다른 나라들도 잘 살아보려고 기를 쓰는데. 세상은 이미 바뀌었어. 공자님 말씀 읽을 시간에 과학책 한 권 더 읽지. 현실을 직시하라구.”
둘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유형. “조선이 그렇게 추락한 건 다 주자학 때문이야. 봉건적 혈연중심주의와 가족집단주의. 이로 인한 개인의 주체성 말살. 권위적 가부장적 질서체계. 사농공상 서열화가 낳은 생산성 무시. 추상적 형이상학을 숭상하여 문치(文治)에 흐르고, 삶의 실질성을 외면한 것 등등. 그 적폐가 이루 말할 수 없지. 임진 병자 양난 이후에도 지배세력은 정신을 못차리고 더 역사적 반동으로만 치달았지. 나라가 망한 것도 내재적으로는 당연한 귀결이야. 이제 그 퇴행적 사상은 완전히 퇴출시켜야 해. 봐, 요새 누가 한문서적 따위를 뒤적인다구.”
셋째, 실기(失機)론 유형. “때만 놓치지 않았어도 우리도 자생적 자발적 자력으로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어. 일찍이 우리도 북학파나 실학운동 등이 있었잖아. 박해 전에는 서학에 대해서도 열려있었지. 정조대왕만 더 살아계셨어도 좋았을 텐데. 지배세력과 위정자들이 기득권에 눈이 멀어 개혁을 가로막고 시대흐름을 외면한 탓이지. 게다가 제국주의 열강, 특히  일본의 야욕의 칼날에 그 개혁정신이 미처 꽃피기도 전에 싹이 짤리고 만 것이야. 그게 어찌 꼭 동양사상의 편협성 때문만이겠니. 한때 실수가 있었더라도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돼.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하지 않겠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맘에 들든 안들든 우리는 우리야.”
넷째, “오직 성현 말씀으로” 유형. “시절이 무도(無道)하여 당장은 대세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숨어서라도 옛 성현의 말씀을 보존 전승해 때가 무르익으면 다시 경세(經世)하리라. 하늘이 무심하지 않으면 그때는 반드시 오고 말리라. 참됨은 올곧음에 있지 많음에 있지 않도다.”

열린 마음으로 
당신은 어떤 유형인가. 또는 어떤 유형이 마음에 드나. 물론 딱 하나에만 해당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이들 사이 어디쯤일 꺼다. 그런데 이 네 타입들을 놓고 볼 때 과연 우리가 전통에 대해 어떤 자세를 지니는 게 가장 바람직할까 하는 물음도 가능하다. 
무릇 하나의 사상이란 어차피 선택적이다. 일원론으로 설명하는 체계도 있고 이원론도 있다. 세상 만물을 동일성에서 조명할 수도 있고 차이에 주목할 수도 있다. 어떤 사상이나 세계관이나 생각에 대해 교조주의적으로 접근하면 위험하다. 도그마는 결국 세상을 억압한다. 모든 극단은 이단이다. 정치적으로도 극우든 극좌든 치우친 생각은 항상 인류를 위협했다. 극단적 생각에 매몰되면 당장은 그게 진짜같고 든든하고 미래가 활짝 열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사상이나 믿음이 삶을 잡아먹는 꼴이 나온다. 이 또한 지난 시간들이 증명한다. 사상이란 또는 신념이나 믿음이란 결국 삶의 위한 도구다. 이걸 망각하거나 오해하면 삶이 위협받는다. 
그럼 어쩌라구. 모든 사유와 사물에 대해 열려 있는 게 좋다. 시간의 흐름따라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중에도 안 변하는 것도 변한다. 그러니 열린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전통도 그렇다. 버릴 것 버리고 살릴 것 살리고, 늘 가치는 새로이 창조되어야 한다. 뭐 그럴 듯한 것 하나 꼭 붙잡고 안주하고 싶지만 머무르면 도태된다. 전통도 그렇고 한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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