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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마당>

20210730일 (금) 11:0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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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최악의 직업들

1501년부터 1600년까지 1세기 동안 런던의 인구는 400%나 불었다. 당시 런던이 직면한 가장 큰 두통거리 가운데 하나는 오물처리였다. 건물 아래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위에서 쏟아버리는 인분이나 쓰레기더미에 종종 봉변을 당했다. 런던 시는 공중화장실 보급에 나섰고 정화조 청소부인 공 파르메들을 엄격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공 파르메들은 인분이 무릎이나 허리까지, 심지어 목에까지 차는 환경에서 일했다. 그들 다수가 악취와 유독가스에 찌들어 희생됐다.

당시 인디고라는 염료가 동양에서 수입되기 전까지 청색 염료의 유일한 공급원은 대청이라는 식물 추출물이었다.

이 대청염료 추출공정은 너무 불결하고 냄새가 심해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이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대청염색공의 작업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이 머무는 곳을 중심으로 8이내에 대청염색공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법령까지 공포했다.

중세 기사의 시종은 어린 소년들이었는데, 그들은 갑옷담당 종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똥 같은, 똥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흔히 폼도 근사한 기사들끼리의 싸움이 금방 끝나는 걸로 묘사되지만 실제 싸움은 몇 시간이 지나도 쉽사리 끝나지 않았고, 혼란과 공포 속에 용변을 볼 시간도 없어 갑옷 바깥에서는 말과 사람의 피와 진흙이 튀겼고, 갑옷 안은 말할 것도 없이 (땀과 오물범벅으로) 더욱 끔찍했다.” 갑옷담당 종자라는 직업은 이 더럽기 짝이 없는 갑옷을 벗기고 기사에게 포도주 한 잔을 바친 뒤 안팎에 떡칠해진 오물들을 깨끗이 손질해 다시 입혀 다음 전장 근처까지 모시고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싸움의 실제 주역이자 주로 희생당한 쪽은 기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하류인생들이었다.

스튜어트조 때 화약재료를 만들었던 초석장이들은 토양 속에 오랜 시간 묻혀 있는 동안 질산칼슘과 질산나트륨으로 분해된 사람·동물의 질 좋은오줌·똥을 얻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했으며, 국왕은 그들에게 아무 집이나 들어가 여기저기 파헤쳐도 좋다는 특권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특히 여인들이 자리에 지린 오줌이 질 좋은 초석 재료가 된다며 당시 예배가 장시간 계속됐던 (그래서 오줌을 지릴 수밖에 없었던) 교회 무단출입 및 채취 허가까지 얻어내려 하는 등 갖은 방도를 궁리했다.

 


남북 분단으로 엇갈린 사랑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은 1919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2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부터 양복을 입고 자라났는데, 이는 매우 부유한 집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26년에 함흥 제일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한 한하운은 내내 우등생이었고 음악과 미술에 뛰어났다.

한하운은 1931년 봄에 몸이 무거워지고 얼굴이 붓기 시작하였다. 의사가 나병인 줄 모르고 온천 요양을 하면 낫는다고 하여 여름방학 때 금강산에 가서 온천욕을 하였다. 증세가 나아져 집으로 돌아온 한하운은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였다. 이듬해 함경남도에서 수험생 열아홉 명이 전라북도 이리 농림학교에 응시하였는데 유일한 합격생이 한하운이었다. 한하운은 1학년 때부터 육상경기부에 가입하여 장거리 선수로 활약하다가 공부를 소홀히 한다는 부모의 꾸지람 때문에 3학년 때 운동을 단념하였다. 하지만 상급학교 수험공부 대신 원고지에 시나 소설을 습작하던 그해 겨울에 한하운은 누이동생의 친구 R과 사귀게 된다. 한하운은 자서전에서 R을 하얀 목련같이 맑고 소소한 여학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리 농림학교 5학년 때인 1936년 봄, 한하운의 팔다리에 심한 신경통이 생겨 밤잠을 잘 수가 없었고 몸 전체에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갔다. 그를 진찰한 경성대부속병원(지금의 서울대부속병원) 의사는 나병이니 소록도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였다. 한하운은 의사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정말 나병이라면 R을 어떡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며칠 뒤에 다시 담당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오른쪽 손목 부위를 칼로 찔러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한하운은 나병 진단을 받고 금강산으로 요양하러 떠났다. 금강산에서 온천을 다니며 나병에 효과가 있다는 약을 사서 한 달 남짓 주사를 놓자 궤양이 사라졌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계속 금강산에 머물러 있던 한하운에게 R이 찾아왔다. 한하운은 R에게 나병에 걸렸다고 고백하였다. 한하운이 R의 행복을 위해 깨끗이 이별해야 한다고 말하자 R은 자기가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또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참되고 행복한 삶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한하운은 R에게 함흥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였지만 R은 여름방학 동안 병시중을 하겠다며 돌아가지 않았다.

한 달 뒤 개학을 앞두고 R과 헤어진 한하운은 다음 해에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서 도쿄의 성계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하운이 고등학교 2학년 때 RY여고보(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한하운을 찾아왔다. 그녀는 도쿄 T여전(여자전문대학) 가사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도쿄에서 R과 일 년쯤 있었을 때 한하운의 몸에 또 이상이 생겼다. 완치된 줄 알았던 나병이 재발하자 한하운은 공포감과 절망감에 허둥거리며 귀국했다. 그는 도쿄를 떠나면서 R에게 병이 재발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한하운은 고향에 들렀다가 또다시 도피하듯이 금강산으로 갔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하운은 죽음같이 사무쳐오는 고독과 슬픔 속에서 R을 그리워한다. 그가 금강산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가량 지난 1939년 어느 여름날 R이 한하운을 찾아왔다. R이 떠난 뒤 한하운은 그녀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한하운은 193910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열 달 동안 중국어 공부를 하고 베이징대학 농학원 축목과에 입학한다. 그는 1944년에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취직하고 나서 경기도 용인으로 전근을 갔다가 1945년에 나병이 악화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한하운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집안 식구들과 식모, R뿐이었다.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한하운은 컴컴한 벽장에 들어가 손님이 가기 전까지는 하루고 이틀이고 온종일 숨어 있어야 했다. 어떤 날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처절하고 가엾어서 울다가 잠이 들면 손님이 간 후에 어머니가 벽장문을 열어 한하운을 불렀다. 대답이 없으면 쭈그리고 자는 한하운을 깨우고는 어머니도 울고 한하운도 울곤 하였다.

이 당시 태평양전쟁이 점점 일본에 불리해져 가면서 한하운은 나병 치료제를 좀처럼 구할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해졌고 약방 대부분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약을 쓰지 못하자 온몸에 궤양이 퍼져 고름이 샘물같이 흘러나오고 고름과 살이 썩는 냄새가 지독하였다. 한하운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동안 R은 서울의 약방과 병원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약을 구해 왔다. 한하운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R의 손을 잡았다.

1945815일 해방을 맞이한 뒤에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소련 군정이 시행되면서 함흥의 지주였던 한하운의 집안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민의 처지로 전락했다. 그때부터 한하운의 남동생은 김일성 정권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집 창고에 무기와 탄약을 숨겨 두었다. 한하운과 R의 끈질긴 만류를 뿌리치고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하려던 한하운의 동생은 194743일 보안대원들에게 연행되었다. 한하운도 체포되어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한하운은 잘 먹지 못한 데다가 날마다 취조를 받고 고문을 당해 나병이 재발하였다.

병보석으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한하운은 R도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하운은 R이 갇혀 있는 곳을 알기만 하면 곧 뛰어가서 형무소라도 파괴하고 그녀를 구출할 마음으로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먼저 나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하여 월남을 결심한다. 한하운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가 대구, 부산 등지로 돌아다니며 치료약을 구한 다음 겨울에 다시 북으로 돌아온다.

그는 동생과 R의 행방을 찾아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허가를 받지 않고 이남에 갔다 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원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여름 한하운은 목숨을 걸고 형무소를 탈출하였다. 한 달간 맨발로 걸어 38선 너머 한탄강에 도착하였지만 이남 땅에는 한하운을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이북 땅을 밟지 못하였다. 한하운이 자유를 찾아 떠난 길은 결국 R과 영영 이별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훗날 한하운은 북에 두고 온 R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R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사랑의 시를 느끼고 그 사랑의 시는 나에게 다시 삶의 욕망이 치솟는 생명의 노래를 주었던 것이다. 또 나는 생각에 잠긴다. 이 세상에 사랑이란 것이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더욱이 나 같은 경우에는 R의 사랑이 없다면 이 심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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