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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한 자락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마당>

20211101일 (월) 10:3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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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한 자락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 김학철의 격정시대를 읽고

 

19877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스러져간 열사들의 이름을 외치며 절규한다. 문익환 목사가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25명의 이름을 목메어 부를 때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였다. 기릴 말을 못 찾을 정도로 너무나 슬픈 죽음이라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치는 것으로 대신했던 그 조사를 들으면서 나 역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 된 사람들

그로부터 1년쯤 지나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학철이 쓴 자전적 장편소설 격정시대를 읽게 되었다. 이 작품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이국땅을 떠돌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갖 고난이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삶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문익환 목사가 명연설로 조문객들의 폐부를 찌르는 순간에 느꼈던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격정시대의 주인공인 서선장은 1932429일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홍구공원에서 열리는 일본군의 경축회장에 던진 폭탄이 명중하여 상해 파견 군사령관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선장은 큰 충격을 받아서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들은 다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여기서 안일하게 공부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선장은 밤새 생각을 거듭한 끝에 폭탄과 권총을 구할 수 있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싸우겠노라 결심한다.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상해에 도착한 선장은 마침내 민족해방운동에 가담한다. 그 뒤 중국군 산하의 조선의용대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조국 땅에서 편하게 마칠 수 있었던 학업을 중단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해외로 나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선장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 숱하게 고민하고 망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의 억압을 벗어나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렇듯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던 수많은 선장들 덕분에 우리 민족은 1945815일 해방의 기쁨을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노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들의 죽음이 더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들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온힘을 다해 살아가다 결국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선장이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하숙했던 집주인 김혜숙의 남편은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조직의 경비를 마련하려고 일본인 자본가의 집을 털다가 경보를 받고 쫓아온 경찰이 쏜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독립투사인 김혜숙의 집 2층에 사는 송일엽은 상해 공공조계의 유명한 댄스홀에서 춤을 추고 손님을 접대하는 댄서였다. 나중에 간호병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그녀는 10여 미터 밖에 떨어진 박격포탄의 파편에 맞아 손등을 다쳐 파상풍에 걸렸다. 그런데 소독할 약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채 운명하였다. 송일엽이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그 죽음이 몹시 안타깝고 허망하여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선장이 어릴 적부터 가장 우러러보며 믿고 따랐던 양씨동은 같은 동네에 살았던 고향 선배였다. 선장보다 먼저 독립군이 된 씨동은 1942년의 어느 날, 일제에 체포된 동료들을 구출하는 작전에 참가한다. 철로에 기름을 잔뜩 발라 동료들을 압송하는 열차를 멈춰 세운 씨동 일행이 찻간으로 뛰어들자 한 헌병이 맨 앞에 있는 씨동을 향해 권총을 빼들었다. 서로 총을 쏘는 와중에 헌병은 배를 맞아 쓰러졌고 씨동은 왼쪽 팔목에 총알을 맞았다. 씨동 일행이 다른 두 헌병의 무장을 해제하고 동료들이 차고 있는 수갑을 열었다. 그리곤 그 수갑을 헌병들의 손목에 채웠다. 그렇게 구출 작전이 곧 끝날 것 같았던 순간에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배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던 헌병이 겨우 몸을 일으켜 씨동의 등 뒤로 총을 쏜 것이다. 날아온 총알은 씨동이의 등을 뚫고 들어와서 그대로 심장에 박혔다. 먼 훗날 문익환 목사가 그랬듯이 그 누구도 이토록 애통한 죽음을 추모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초월한 국제주의 정신과 연대

격정시대의 시간적 배경을 이루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는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생활하고 있었다. 선장은 그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면서 국제주의 정신과 연대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다.

1929년에 벌어진 원산 총파업은 선장이가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일본 사람들을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선장은 친구와 함께 구경하러 간 파업 현장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파업을 진압하려고 나타난 무장 경찰대와 조선의 노동자들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였다. 원산항에 정박해 있는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일본 선원들이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들을 굴렀다. 그들은 "파업 만세!", "형제들 버텨라!"를 외치면서 파업 노동자들을 응원하였다. 잇따라 다른 배들에서도 일본 선원들이 일제히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응원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열서너 살 무렵의 선장이는 비록 나라와 민족이 다르더라도 사회적 약자로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모습을 처음 보면서 색다르고 충격적인 감동을 느낀다.

1931년 여름 중국 길림성 만보산에서 관개수로 때문에 조선 이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각 신문에 연일 보도 기사가 나가자 맹목적인 동포애로 피가 끓어오른 조선인들이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쌓이고 쌓인 민족적 분노와 불만이 엉뚱한 곳으로 표출된 것이다.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선장이는 안국동 네거리에서 화교가 경영하는 요리점을 숱한 사람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중 몇몇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하며 한창 기세를 올리자 중국 사람들이 출입문을 열고 나와 연장을 휘둘렀다.

조선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서로 얽혀서 좌충우돌하고 있을 때 그들 앞을 가로막아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선장이가 소학교를 다닐 적에 담임 선생님이던 김영하 선생이었다. 김영하 선생은 웃음 띤 얼굴로 모여 선 사람들을 둘러보며 침착하게 말하였다.

"우리 백의민족은 죄 없는 외국 사람을 멸시하거나 욕보이는 일이 없습니다. 숱한 사람이 달려들어 몇 명 안 되는 외국 사람을 매질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자존심 있는 민족은 그런 짓을 안 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동안에 차차 살기가 사그라지고 보복심이 수그러들어 하나둘씩 흩어져갔다. 평소에도 강자보다 약자를 옹호하고 편들었던 선장이는 김영하 선생 덕분에 동포애를 초월한 정의감을 더욱 또렷하게 심장에 아로새길 수 있었다.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은 19411212일 중국 하북성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된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가서 나가사키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1945109일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다. 이듬해에 북한으로 가서 살다가 1952년 중국 연변에 정착하여 활발히 창작활동을 한다.

김학철은 2001925일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남한과 북한,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친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이런 유언처럼 우리 겨레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일제가 자행하는 불의와 억압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제대로 기록되지도 않았고 국내에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우리 민족사의 한 자락이 격정시대에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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