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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분열과 갈등과 양극화를 넘어서

20220504일 (수) 11:20 입력 20220504일 (수) 11: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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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21세기도 어언 20년이나 흘렀다.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세월은 항상 훌쩍 간다. 20세기 이념의 시대도 가고, 이제는 과학기술이 모든 걸 주도하여 결국 유토피아 비슷한 세상도 꿈꿔볼 만한 시대가 됐다고들 말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세계경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핵무기만 없다 뿐이지 군사적으로도 만만찮은 부국강병의 나라가 됐다. 국제적으로 선진국 대우를 받으니 한편 뿌듯하기도 하다. 게다가 한류는 또 어떻고, 손흥민을 비롯한 젊은 운동선수들도 민족적 자존심을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얘기가 그리 고무적이지만은 않다. 불평등 양극화가 심화되니 국론은 갈수록 분열된다. 그러니 서로 차별과 혐오만 야기된다. 에이, 공동체 따위야 난 이제 모르겠고, 나 하나만이라도 잘 살아야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그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편견과 폭력이 횡행하고 이합집산이 끊이지 않는 편가르기가 난무한다.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공동체와 담을 쌓고 살고, 못 가진 자들의 일상은 날로 팍팍하다. 나라가 선진국이면 뭐하나. 내 삶이 뭣 같은데. 특히 젊은층의 미래가 낙관적이지 않다. 출산율 자살율 노인빈곤율 실업율 등 각종 사회지표는 부정적 기운만 비치고, 부동산은 미쳐 날뛰고, 기득권은 요지부동이다. 

유토피아 환상

살림살이가 아름답고도 신나는 그런 세상은 불가능할까.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꿈꿔 왔지만, 아무도 이룩하지 못했다. 인류는 장미빛 청사진을 그리며 이런 세상도 만들어 보고, 저런 세상도 만들어 봤지만, 결국 역시나였다. 인간의 근본 한계일 테다. 그나마 현재 가장 그럴듯한 사회체제는 정치로는 민주주의고, 경제로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한때 공산권이 붕괴될 당시 어떤 이는 이제 체제경쟁은 끝났다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결국 섣부른 판단이었다. 사람 자체가 모순된 존재고, 모순은 그 자체 동력으로 끝없는 변화를 낳는다. 세상에 최종 완결판은 그래서 없다. 사람은 모순되고, 세상은 변하니 우리는 늘 적응을 위해 고민해야 할 운명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놓은 목하 지구촌 글로벌 주도체제도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더구나 두 체제는 원만한 융합을 이룰 수 없는 자체 속성들을 갖고 있다. 사회적 의결정권에 있어서도 민주주의는 1인1표고, 자본주의는 1원1표다. 민주주의는 시민이면 다 자기 권리를 동등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돈 많은 사람이 말빨이 세다는 게 그 원칙이다. 각자 장단이 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모순된 존재라 이런 이해충돌 시스템을 동시에 가동시킬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의 충돌인데, 둘 다 소중한 가치이니, 그게 딜레마의 진원지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지금 우리사회가 채택한 민주주의는 서양 사람들이 일찍이 땀과 피로써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그냥 빌려와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때로는 제대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 고대 아테네가 직접민주주의로 민주정신의 효시를 만들었지만, 서양도 17, 18세기 신분제 사회의 구체제 모순이 극단에 이르러서야 근대민주주의를 출범시킨다. 사상이 있었고, 혁명이 있었고, 행동이 있었고, 시행착오가 있었다. 오죽하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섬뜩한 얘기까지 나돌까. 천부인권, 인간존중, 삼권분립, 법치주의, 선거와 대의정치 등 필수 장치를 마련하는 데는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앞장을 섰다. 그 주도세력이 바로 부르조아다. 상공업으로 자산을 일군 신흥 시민계급이다. 일찍이 자본주의에 눈을 떠 돈을 많이 벌이더니 그 금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권리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런 사회진화의 흐름이다. 힘이 있는데 권리는 없다는 게 수긍이 되겠는가. 약자에게 굽신거리면 살 순 없는 것 아닌가.  

암튼 부르조아 시민계급의 정치적 승리로 서구사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동행을 하게 된다. 그 자본주의는 점차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주의로 발전하면서, 그들이 그렇게 열망한 민주주의, 인권은 유색인종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유색인종은 열등하기 때문이란다. 자유와 평등을 요구한 부르조아는 이제 또 다른 기득권이 됐고, 이에 저항하는 자들을 당연히 억압한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특히 집단과 대중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는 물리력이라는 야만성과 아주 가깝기 마련이다. 

평등과 사유재산

민주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잘 어울리진 않는다. 사람은 각자 능력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그 능력에 따른 생산물의 우열이 있게 마련인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이 평등하다면, 이는 분배적 정의에도 어긋난다. 정당한 내 몫을 못 가진다면 그건 불의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가진다는 사회주의의 모토가 한낱 환상으로 귀결된 것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이다. 말이야 멋지지. 평화로운 이상사회가 된다고. 사람은 그다지 성인군자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아직 고전인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인간 본능에 제법 어울린다. 일단 사유재산이다. 자기가 생산한 몫은 자기가 가진다. 그게 정의 아닌가. 자발적 자선으로 베풀 수는 있지만, 힘있는 자가 내 걸 빼앗아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발적 자선은 선이고, 착취 수탈은 악이다. 내가 벌어 먹고 사는 건 선도 악도 아니다. 그냥 일상이다. 그렇기에 사유재산 제도가 무너지면 발전이 없다. 내 게 될지 안될 지도 애매한데 뭐하러 열심히 일할까. 우리는 옛날 사회주의 체제에서 그 진상을 목도했다. 

자본주의는 원리상으로는 정당한 노동의 가치를 지켜줬기에 풍요를 가져왔다. 인류역사에 이런 풍요는 일찌기 없었다. 물론 양극화라는 병폐도 엄연하다. 하지만 양극화는 개선할 문제지, 자본주의 자체를 폐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최소한 현재로서는 그렇다. 

인간소외

자본주의가 생산량 차원에서는 부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실제 분배에서는 심한 왜곡을 낳기 십상이다. 양극화 불평등이 저절로 야기된다. 무한증식을 추구하게 마련인 자본의 속성상,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 욕망의 본성상 자본주의는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고, 그 무한경쟁은 사회와 인간을 망가트린다. 풍요의 이면엔 인간소외가 엄연하다. 자본주의에서 인간소외 현상은 여러 측면에서 거론된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사회적 관계의 소외, 생산자 스스로의 존엄성 소외 등이 그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과 자본이 선명히 갈라지지 않고, 노동자 스스로도 자본주의를 내면화하는 만큼 왠만한 소외는 견딜만하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소외는 관계의 소외, 즉 무한경쟁이 낳는 외로움이다. 

경쟁은 필요하다. 재미있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승부욕이란 것도 있으니까.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 시합은 친구들과 같이 달리고, 공정한 룰 안에서 서로 우열이 가려지기에 좋은 경쟁이다. 그러나 자본의 무한이윤 추구가 낳는 무한 경쟁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지경이 아니다. 특히 승자독식의 사회에서는 생존이 걸린 게임이다. 즐거운 경쟁은 사람을 살리지만 무한경쟁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인 세상은 결코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이 전부 그 쪽으로 달려간다면 어쩌겠는가.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한가지면 죽어라 달릴 수 밖에.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제 룰도 수단방법도 가릴 처지가 아니다. 

공정과 상식

우리는 민주주의를 빌려 왔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가해 본 경험과 경륜이 아직 부족하다. 일단 생존에 올인하느라, 우리 몸에 맞는 민주주의를 구상해 볼 여유도 없었다. 멈추면 죽는 게임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 왔다. 기득권자들의 성공 경험에만 끄달려 죽어라 달려온 세월이다. 선진국이 됐다지만 내 삶이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부국강병이 될수록 기득권은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적 카르텔을 공고히 하고 그들의 전리품을 수호하기에 급급하다. 선전과 선동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며, 대중은 이에 동의하고 동조한다. 자발적 복종은 강압적 복종보다 더 무섭다. 

어쩌면 선진국 문턱을 막 넘어섰을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다. 다 같이 못 살 때는 평등은 했다. 나눌 떡이 없는데 싸울 일이 있을까. 파이가 커지면 논공행상이 진행되고 각자 몫 챙기기 투쟁이 벌어진다. 그 투쟁을 원만히 조정 못한 사회는 미래가 없다. 조정의 룰을 기득권층이 일방적으로 정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양극화는 더 심화된다. 선진국 문턱을 넘자마자 다시 주저앉거나 밀려난 나라들을 역사는 숱하게 증거한다. 상생하지 않으면 공멸이라는 것 인류사회의 자명한 공리다. 

결국 지배층의 현명한 대각성이나 이를 촉발할 대중적 저항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필자의 지나친 기우일까. 미국식으로 하면 되는 것 같다고들 하지만, 미국은 자원과 인재가 넘치는 나라다. 인적 물적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지향할 길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가장 적합한 나름의 상생가치를 정립하여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지 못하면 미래는 불투명하다. 공정과 상식을 표방한 새 정권에 이를 강력 촉구하며 기대한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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