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서브메뉴로 바로가기

[전인철 칼럼] 유머가 있는 당신이 좋다

20220609일 (목) 13:01 입력

  • 축소
  • 확대
  • 이메일 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보내기
  • 트위터 보내기
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많은 사람을 자신과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신보다 먼저, 때로는 자신 대신 죽게 한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러니,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워낙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이 알고들 있겠지만, 소설은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웃으면 안 돼
때는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이러저러한 일로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을 방문한다. 그런데 월리엄이 이곳에 도착한 즈음 수도원에서는 연일 수도사들이 죽어 나간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연쇄 살인이었다. 그것도 첫날은 폭설 속의 시체, 둘째 날은 피 항아리 속에 처박힌 시체 등등, 묵시록의 예언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월리엄 수도사는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간다. 문제의 장소는 수도원 내 도서관. 그러나 비밀의 열쇠를 쥔 책은 정체가 밝혀지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 책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희극’이라는 책이었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이 수도원에는 극보수 성향의 신앙관을 가진 호르헤 수도사가 있었다. 수도원 내에서 꽤 주요인물인 그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참된 신앙은 한없이 경건하고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신 앞에 엎드려 매일 눈물로 속죄하고 살아도 모자랄 타락한 인간이 하하 호호 웃으며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다. 인간에게 그런 교만을 허락한다면 종국에는 신마저 비웃으려 할 것이다. 신이 인간 따위의 웃음 대상이 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이런 호르헤 수도사로서는 ‘인간은 웃을 수 있는 존재’임을 정당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이라는 책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것도 수도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군가. 중세 스콜라 신학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분 아닌가. 참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책을 썼다는 걸 숨겨야 한다. 못 읽게 막아야 한다. 아니. 금서로 지정된 책을 억지로 찾아 읽으려는 자들은 응징해야 한다. (사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쓰고는 곧 이어 쓰겠다고 한 책이지만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진리를 위한 죽음
호르헤 수도사는 끝내 ‘희극’의 모든 낱장 아래 부분에 독약을 바른다. 감히 ‘악마의 책’에 접근하려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 영생을 위해서라면 현세적 생명 따위는 한낱 물거품이다. (당시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기곤 했다. 당시 서양의 종이는 동양의 식물지와는 다른 면섬유지였다. 중국의 종이 제작 기술이 중동을 거쳐 유럽에 전해진 건 12세기 경이었지만, 서양 종이 재질은 동양과 달랐던 것이다. 면섬유지란 넝마 아마 밧줄 면섬유 옷 등 면이나 아마 옷감을 재료로 만든 종이다. 물에 불려 만든 면종이가 다 마르면 마지막으로 아교를 먹였다. 이러니 책을 만진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면 독살도 가능했으리라. (면섬유지 종이는 근대 산업혁명 후 나무의 라그닌 성분을 주성분으로 하는 목재 펄프 가공이 나오기 전까지 유럽 종이의 근간이었다.) 몰래 책을 읽은 수도사들은 혀가 새카맣게 타들어 가 죽었다. 호르헤 수도사는 살인을 은폐하는 동시에 그 죽음의 교훈을 남기고자 묵시록적 계시가 실현되는 듯한 현장 조작까지 벌인 것이다. 
사건의 비밀을 밝혀낸 월리엄이 호르헤를 닥달하자 호르헤는 도서관에 불을 질러, 자신과 함께 ‘희극’도 불살라 버린다. 호르헤 수도사는 목숨을 바쳐 ‘진리’를 지킨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도. 수도원은 사흘 밤낮을 탔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많은 사람을 자신과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신보다 먼저, 때로는 자신 대신 죽게 한다.”

무리 일리 진리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2001년 미국의 911테러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자살테러가 연상된다. 그들의 억울한 역사적 배경은 십분 이해가지만, 그 모순을 풀기 위한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 어떤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그렇다. 또 동시에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자 KKK단도 생각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억울한 역사라도 있다지만, KKK는 백인 우월주의와 기족교 근본주의에 근거한다. 그 어떤 핑계도 변명도 불가한 자들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번듯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도 동서고금 수천 년을, ‘진리’라는 이름을 걸고서 말이다. 사실 가까이는 요즘 우리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이념적 극단주의자들도 이들에 비해 비록 과격성은 약하지만 근본 속성은 같이 한다. 태극기 부대나 극좌주의자 같은 경우 말이다. 물론 ‘무리’를 범하는 이들에게도 일말의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리’를 100% 담지하진 않는다.  
도대체 진리라는 게 무엇이길레 이리도 방자하단 말인가. 진리에는 여러 측면이나 영역이 있겠다. 가장 객관적이라 할 수학적 진리부터, 이를 바탕한 과학적 진리와, 인간 이해관계를 풀어주는 사회적 도덕적 진리, 삶의 의미와 방향을 설정해주는 종교적 진리 등등 다양한 진리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진리’라는 건 사실 그게 누구의 진리이고, 언제의 진리이고, 어디서의 진리인가 하는 상대성을 가진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욕망과 아집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는 근본 바탕에는 잘 살아보려는 욕망이 자리한다. 진리대로 살면 잘 살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욕망이다. 진리 신념 옳음의 밑자리에는 그런 욕망이 엄존한다. 그래서 내가 알게 되고 깨닫게 된 진리를 기둥삼아 옳고 강하고 굳세게 잘 살아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신념은 ‘단순하고 하나’이면 그만큼 더 쉽고 힘이 있다. 나약한 인간이 영원히 기댈 수 있는 카리스마다. 그래서 사람은 다양성과 상대성을 싫어한다. 이놈도 옳고, 저놈도 옳다면 도대체 진짜 옳은 게 뭐란 말인가. 다 제 잘났다고 설쳐대면 세상 질서가 무너지고 말 것 아닌가. 뭔가 ‘옳고도 강력한 하나’즉, 신이, 영웅이, 리더가 그 권위와 카리스마로 우리를 이끌고, 우리는 그걸 수호해야 잘  살 수 있어. 이를 벗어나는 자들은 응징하고 심판해야 해. 그게 진리다. 
진리의 이런 절대성이 문제라고 해서 상대성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 프로타고라스라는 상대주의 철학자가 살았다. 유명한 소피스트다. 그가 그랬다. “세상에 진리라는 건 없다. 설사 있다 해도 우리는 그걸 알 수 없다. 설사 안다 해도 남에게 전할 수 없다.”
상대주의나 절대주의나 모두 극단은 아집일 뿐이다. 뭐든지 너무 나가면 탈나기 십상이다. 당장은 속시원하고 기분 좋겠지만 결국 내 손해다. 거짓말과 막말을 밥먹듯 하는 침략주의자 일본이 싫다고 일본과 무역을 아니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머리 아프고 신경질 나지만 응징할 건 응징하고 협조할 건 협조하고 사는 게 삶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삶에 복무해야 한다. 삶을 위해 진리가 있는 것이지, 진리를 위해 삶이 있진 않다. 우리는 자주, 정말 자주 이를 착각한다. 주객전도다. 주객이 전도되니, 정치인이 국민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인 걱정을 하는 사회가 된다. 종교가 세상을 맑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 때문에 더 흐려지는 것이다. 
진리 맹신, 이념 광신, 나는 옳아, 너는 틀렸어. 이를 좀 희석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인간은 그런 장치도 많이 계발했다. 그 중 하나가 유머다. 풍자나 해학이다. 생각이 넉넉해야 유머도 나온다. 사람들은 유머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전인철 편집주간

지역 칼럼
  • 이전
    이전기사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