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인생 성공을 꿈꾸는 건 무릇 젊은이의 특권이다. 한때 꿈과 희망으로 밤잠을 설쳐보지 않았다면 어찌 젊음이라 하겠는가. 세상은 이런 젊은 야망으로 굴러간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he Wolf of Wall Street)’도 이런 혈기방장한 야망을 그리고 있다. 스물 두 살 난 청년 조단 벨포드는 백만이 아닌 억만장자가 되고 싶었다. 당연히 세상 돈이 모두 모이는 월스트리트로 간다. 그러나 꿈도 잠시. 블랙 먼데이를 맞아 회사는 파산하고 만다.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다. 수단과 방법은 뭔 얼어죽을. 쓰레기주식을 팔아서라도 성공해야지. 친구들을 불러모아 회사를 차린 그는 화려한 언변, 즉 말빨 하나로 순식간에 엄청난 주식을 팔아치운다. 하지만 그건 사기였다. 사기면 어때. 꿩 잡는 게 매지. 그 매는 주가 조작으로 월스트리트 최고의 억만장자가 된다. 돈을 주체할 수도 없고, 또 마땅히 쓸 데도 없어 술과 파티, 여자에게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그 공허함은 마약으로 메우고. 급기야 그는 FBI의 표적이 되고. 회사는 거덜 나고. 하지만 옥살이까지 치룬 그는 다시 말빨 하나로 시장에 나선다. “글쎄, 이건 사두면 무조건 이익이라니까.” 삶은 야망과 몰락과 재기의 반복이기도 하려니와, 이는 욕망과 어리석음과 사기의 재현이기도 한 것. 이 영화는 1990년대 대규모 주식 사기로 징역을 살았던 조던 벨포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흥행도 꽤 성공했다.
돈 사랑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실화다. 몇 년 전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즈에는 ‘많이 다른 조던 벨포트’라 할 샘 포크의 기고문이 실렸다. 제목은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For the Love of Money)’. 현재 한 비영리단체(NGO)의 대표인 샘 포크는 10여 년 전만 해도 월스트리트에서 연봉 수십 억 원을 받는 트레이더였다. 잘 나가던 그는 왜 수십 억을 버리고 ‘비영리’의 길을 택했을까.
명문 컬럼비아대학생 포크도 부자가 되고 싶었다. 가난이 싫었기 때문이다. 신통찮은 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도 항상 부자 타령이었다.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니까.” 대학을 졸업한 포크는 곧바로 미국 최대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취직했다. 열심히 일했다. 첫해 보너스가 4만 달러. 꿈같은 액수였다. 그런데 이웃 회사의 대학 선배가 받은 보너스는 90만 달러. 무려 포크의 22배였다. “나도 그럴 날이 오겠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포크는 미친 사람처럼 일했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돈은 좋았다. 미녀들과 데이트하고, 맨하탄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호화 아파트에 사는 생활이 시작됐다.
돈 중독 탓에
그러던 차에 반전이 찾아왔다. 헤지펀드 관련 개정안에 대해 회의를 하는 자리였는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규정을 바꾸면 우리 이익에 줄어든다며 개정을 거부했다. 그런데 아직 애숭이인 포크가 이에 태클을 걸고 나선다. 기존 규정은 불합리하고 공정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순간 회의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하지만 포크에게는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더 강했다. 모든 것을 가지다시피 한 사람들이 더 가지겠다고 앞뒤없이 우기는 이기심.
포크는 순간 자신의 삶이 중심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억만장자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중독’이 됐던 것이다. 어떤 걸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면 그건 이미 거기에 중독된 것이다. 포크의 반발심은 정의감에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건강함이 무너졌음을 자각한 때문이었다.
번민 끝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 새 삶을 살고 싶었다. 당장은 무척 힘들었다. 은행잔고가 없다는 통보에 당황한 적도 있고, 옛 동료가 승진했다는 소식에 천정을 쳐다보기도 했다. 돈에 대한 집착은 집요했다. “가끔 로또를 사기도 했다.” 수렁에서 발을 빼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그는 현재 LA에서 ‘그로서리십스’라는 NGO를 운영하고 있다. 사람들에게서 돈을 기부 받아 빈곤층에게 무료로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일을 한다. 포크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
무한투쟁의 끝은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다. 너나없이 잘 살려고 애를 쓴다. 삶이란 그 애씀에 다름 아니다.
잘 산다는 게 정녕 무얼까. 그건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욕망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통된 그 무엇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성이 대동소이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현상적으로 드러난 본성과 우리 속에 잠재된 채 숨죽이고 있는 본성은 구별될 수 있다. 그 드러남과 숨죽이고 있음은 사회성 역사성을 지닌다. 세상은 흐르고, 흐르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산다는 건 시대별 문화별로도 다르리라. 개인의 욕망이란 것도 사실 사회화 내면화를 거친 특정사회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초입의 대한민국은 무얼 주도적으로 욕망할까.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걸 잘 산다고 할까. 여러분, 부~자 되세요. 아들 딸들아, 열심히 공부해 꼭 성공하거라. 오늘도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무한 투쟁을 벌인다.
잘 살아왔다는 느낌
그의 학창시절은 고단했다. 급기야 학습장애 진단도 받았다. 이를 악물고 힘겹게 힘겹게 대학을 들어갔지만 낙제를 거듭했다. 그러나 좌절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학교를 두 번이나 옮긴 끝에 결국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아낸다. 이제는 삶이 좀 나아지려나. 결혼해 귀여운 두 딸을 얻었고, 중독전문 정신의학 전문가로 자리도 잡았다. 그러나 운명은 가혹한 법. 결혼 10년째 되던 서른 세 살에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됐다. 절망, 우울증, 이혼, 연이은 가족의 죽음. 그러나 역시 좌절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휠체어에 앉아서 환자를 맞이하며 비애와 시련 속에서 단련한 삶의 지혜를 세상과 나누었다. 모든 건 변하는 법. 둘째딸이 손자를 낳았다. 천사와 만난다는 건 천상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하나 뿐인 그 손자가 두 살 나던 해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 딸이 짠했다. 어려선 아빠를, 남은 평생은 장애아들을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 삶. 그는 ‘산다는 것’을 두고 손자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몸이 아프고, 손자는 맘이 아프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아픔을 견디고 이겨내는 일이다. 그래서 그 편지는 세상 모든 ‘손자’를 향한 이야기가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고틀립이 들려주는 이야기 ‘샘에게 보내는 편지’다.
편지는 성공이란 꼭 돈을 벌고 이름을 드날리는 일만은 아님을 일깨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내 인생을 제대로 잘 살아왔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웃 공동체 가족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모든 걸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성공도 좋고 돈도 좋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뭐든 중독은 나쁘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나쁜 것에 끌린다. 잘 살기가 쉽지 않은 또다른 이유다. 물론 모두들 돈 돈 하는 세상에서 나홀로 딴소리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물에서 수영하고도 몸이 젖지 않기가 어디 가당키나 할까. 하지만 젖는 거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물에 빠져 죽어서는 곤란하지 않나. 물론 빠져 죽을 만큼의 돈 구경이나 한 번 해보면 좋겠다고 반론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가난해서 문제지, 부자라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접시물에 코 박고도 죽을 수 있는 게 또 세상이다. 중독이 그래서 무섭다. 나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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