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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 마당>

20221007일 (금) 13:5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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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4개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오웬

제시 오웬이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시의 이스트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그는 이미 국내 고교 육상 경기 신기록을 3개나 보유하고 있었다. 오하이오 국립대학에 진학한 후에 그의 기록은 점차 향상되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니그로 스피스터(검은 주자)라는 획기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오웬의 실력이 가장 눈부시게 나타났던 경기는 1935525, 미시건 주의 안 아보르에서 개최되었던 빅 텐 육상 경기였다. 그 당시 병에서 막 회복된 오웬은 첫번째 경기였던 100야드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과 같은 9.4초를 수립하였으며 10분 후에 벌어진 넓이뛰기에서는 단 한 번의 시도로 7.8m라는 세계 신기록을, 그리고 곧이어 9분 후에 벌어진 220야드 달리기에서도 20.3초를 기록하여 또다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였으며 경기 개막 후 45분 후에 벌어진 220야드 장애물 경기에서도 22.6초라는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하루 동안 그것도 45분 만에 4개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 오웬의 기록을 깬 인물은 없다.

 

 

노래하는 멤논의 거상

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의 왕 아멘호텝 3세는 테베 시 근처에 자신의 신전 무덤을 만들면서 그 입구를 지키는 2개의 거상을 세웠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집트인들은 항상 동이 틀 무렵이 되면 이 2개의 거상에서 신비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역시 이 현상을 신비스럽게 생각하던 그리스인들은 이 거상을 전설 속의 반신반인인 멤논이라고 부르며 하루에 한 번씩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그 멤논이 '새벽의 여신'인 그의 어머니 이오스에게 올리는 문안 인사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지진에 의하여 2개의 거상 중 하나가 파괴되어 셉티무스 황제가 그것을 복구하였으나 그 신비스러운 노랫소리는 영영 중단되고 말았다(요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 거상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 그 신전 무덤까지 사라진 사막의 폐허에는 2개의 거상만이 쓸쓸한 침묵을 지키고 서 있지만 아직도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가 떠오르면서 사막의 기후는 급격한 변화와 함께 거센 기류 현상을 일으킨다. 이 공기의 흐름이 거상의 헐거운 접속 부분을 지나면서 신비스러운 마찰음을 만드는 것이며 복구된 후에 이러한 소리가 영영 사라진 이유는 복구 작업할 때 거상들의 헐거운 접속 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곧 신비스러운 소리의 정체가 오르간 파이프의 원리로서 설명될 수 있다면 이 거상들은 괴상하게 조각된 역사상 유일한 작품이 될 것이다.

 

 

죽은 후에도 글을 쓴 사람

중국의 조신 링 웬은 그의 황제 융로(1360~1424)의 면전에서 변절자라고 욕을 퍼부은 죄로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형 집행일이 가까워지자 그의 주변 사람들은 황제에게 사정하여 참수형만은 내리지 말라고 권해 봤지만 링은 "내가 죽은 뒤에도 그를 변절자라고 부르겠다!"라고 하며 단호한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드디어 형이 집행되어 그의 목이 땅에 떨어지자 그의 잘라진 목에서 뿜어 나온 핏줄기는 모래 위에 뚜렷한 문자로 '변절자'라고 쓰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황제의 입에서는 "마지막 유언이구먼"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후 이에 충격을 받은 융로 황제는 그의 수도를 난징에서 지금까지 중국의 수도로 남아 있는 베이징으로 옮기게 되었다.

 

 

브론딘의 줄타기

금발인 머리 색깔에서 유래된 '브론딘'이라는 예명을 갖고 있던 진 프란코이스 그란뎃은 아주 대단한 모험꾼이었다. 1859년 그는 330m가 되는 나이아가라 폭포 양쪽에 8cm 두께의 로프를 수면으로부터 48m 높이에 건 다음 두 손에 쥔 1.2m의 막대기를 균형봉으로 삼아 자전거를 타고 이 줄을 건넜고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눈을 가리고 줄을 타기도 하였으며 어떤 날을 손수레를 밀면서 이 줄을 건너기도 하였다.

한번은 그가 장정 한 명을 등에 업고 이 줄을 건너겠다고 하자 수천 명의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이것을 구경하려고 모였는데 아무도 브론딘의 등에 업혀 줄을 건너겠다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그의 매니저를 업고 건넜다. 이 당시 그의 매니저가 어찌나 부들부들 떨던지 그 후 브론딘은 다시는 사람을 업고 건너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기를 즐기던 브론딘은 줄 위에서 재주를 넘기도 했으며 폭포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모자에 총을 쏴서 구멍을 내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모험은 프라이팬과 난로와 달걀을 가지고 줄을 탔던 일이다. 그가 그 취사도구로 줄 한가운데에서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먹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꿈꾸고 있던 모험은 달빛도 없는 야간에 밝은 불빛을 받고 있는 줄을 건너다 도중에 그 불을 완전히 끈 다음 칠흑같이 어두워진 상태에서 나머지 거리를 줄을 타고 건너는 것이었다.

186098, 그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영국 황태자가 참관하고 있는 가운데 이 브론딘의 재주가 펼쳐지게 되었다. 줄을 건너는 브론딘의 양 발목에는 고리가 달린 각반이 매어져 있었으며 그 고리는 줄에 끼워져 있었다.

황태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중간쯤 건너온 브론딘의 몸이 갑자기 줄에서 미끄러지며 물속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듯하였다.

사람들의 비명 속에 기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관람객들은 모두 그가 줄에서 떨어져 죽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거꾸로 한 브론딘의 몸은 줄에 매달린 채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줄 위에 올라서는 것이 아닌가! 브론딘이 아무도 모르게 준비하고 있던 발목의 고리가 사람들의 눈에 보였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자세를 갖춘 브론딘은 유유히 줄 위를 걸어 캐나다 쪽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한때 하인의 위치에 머물렀던 작곡가들의 지위

18세기에 중부 유럽의 여러 국가의 왕실에서는 카펠마이스터라고 불리는 직분의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이 직위는 궁중 악장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교회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의 역할은 우선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오르간을 연주하고 예배를 위한 음악을 준비하거나 때로는 작곡까지 하여야 했다. 세속적인 순서도 맡아야 했는데 그 왕실이 어떤 나라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연주회가 되기도 했고 제례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하이든은 헝가리의 에스테루하지 왕자의 궁중 악장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콜로레도에게 고용되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도 몇 군데의 그런 왕실에서 일을 하였다.

그 당시의 소공자들은 음악가들을 시종으로 거느렸는데 그의 경제적인 능력이나 음악적 기호에 따라 거느리는 사람의 수는 마음대로였다. 이런 음악하는 시종들의 우두머리가 카펠마이스터이다. 그의 임무는 필요한 때에 맞추어 적절한 음악을 제공하는 것이다. 훌륭한 카펠마이스터는 음악을 연주하고 지휘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주인의 기호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음악을 작곡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작곡가는 수준작을 만들기 위해서 일상 생활고 격리되어 1년이라든가, 혹은 그 어떤 여가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작가가 잘 묘사하였듯이 "이 카펠마이스터들은 새벽에 일어나 새 곡을 작곡하고 낮 동안에 연습하였다가 저녁에 공연을 했다." 카펠마이스터를 포함하여 이 음악가들의 위치는 하인의 신분이었다. 하인의 복장을 하고 하인방에서 자고 하인의 상에서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시간은 엄하게 감시를 받았다. 헝가리 소공자와 하이든 사이에 맺어진 구두 계약에 따르면 그 소공자는 하이든의 음악인으로서의 임무보다는 의식을 치르는 일과 규율에 엄격해야 한다는 등의 문제에 더 신경을 쓴 것 같다.

모차르트는 그런 하인의 지위에 대해 굴욕감을 느꼈던 표시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실제로 그는 주교에게 반항함으로써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발길질을 당했다.

만일 이 음악가들이 어떤 의미에서 철창에 갇힌 죄수와 같다고 해도 하이든과 같은 천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창을 부수고 나올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마이클 브레넷의 말을 빌리자면, 베토벤은 "많은 독일의 음악가들이 주인에게 완전히 얽매여 그들을 물질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또 다른 노예임을 확인시켜주는 그 명예를 단연코 거부하였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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