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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을 수도

20221024일 (월) 16:3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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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제가 물었습니다.
"글쎄요... 어디든 가겠지요."
"좋은 데로 가실 것 같나요?"
"있다면 갈 것 같아요."
"지금 누가 가장 보고 싶으신가요?"
"어머니요. 부모님이 마중 나와 계시면 좋겠어요."
이상은 지난 9월 중순 포탈 매체 오마이뉴스에 신아연 작가가 쓴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서 내가 들은 기막힌 농담’이라는 기사의 한 대목이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지인들에게) "인제 그만 가야겠어. 먼저 갈게. 나중에 만나자고. 그리고 수목장을 하게 될 테니 꼭 한 번 와줘." 
"밖에 사람을 불러 줘."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어서. 모두 배고플 거야. 내가 어서 가야 점심을 먹지."

내가 어서 가야 점심을 먹지
기사에 따르면 안락사의 주인공은 신 작가의 오랜 독자. 폐암 말기에 이르러 두 번이나 시술을 받았지만 2년 후 재발했고, 결국 본인의 애당초 결정대로 스위스로 가 스스로 안락사를 결행한 분이다. 2021년 8월 26일 한국 시각 오후 7시경 64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지금 공주의 한 추모공원에 영면하고 있다. 죽음의 전 과정은 본인에 의해 진행됐고, 신 작가는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한다.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택한 한국인은 2016년, 2018년에 이어 이 분까지 모두 3명. 이 분은 살아 생전 스위스 자력사 도움 단체에 안락사를 신청해 승인을 받았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스위스로부터 안락사가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낌이 어땠냐고요? 그동안 깊이 생각했고 오래 준비해 왔기 때문인지 담담했습니다. 슬픔이나 아쉬움, 회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은 없었습니다. 이제 언제 생을 마감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됩니다. 이제 저는 버킷리스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편안하게 평범한 일상을 살 뿐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스위스로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원 웨이 티켓’을 손에 쥐고...”
신 작가는 지난 8월 저간의 사정을 기술한 책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 5일’을 출간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삶
우리는 평소 삶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한다. TV 드라마나 소설이나 친구와 사소한 수다에서도 이야기의 대부분은 사는 이야기다. 반면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린다. 가끔 주변 사람의 죽음을 마주할 때나 겨우 몇 마디 나누는 정도다. 뉴스에 이런저런 죽음 이야기가 나와도 그건 그들의 죽음이지 실감나는 나의 죽음은 아니다. 평소에도 사람들은 마치 안 죽을 것처럼 행동한다. ‘백 년도 채 못사는 인간이 마치 천 년을 살 것처럼 계획하고 행동한다.’ 죽음을 애써 감추고 외면하는 건 무섭기 때문이다. 이는 생존본능이다. 그 공포와 불안을 덜고자 억압과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정신의학은 설명한다. 우리 조상들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헸다.
한때 우리 사회에도 ‘웰 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웰빙(Well-being) 끝에 나온 얘기다. 잘 살려면 잘 죽기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취지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억압해도 죽음은 삶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늘 함께 있다. 조상들도 ‘대문 밖이 저승’이라 했던가. 암튼 잘 살기 위해서는 잘 죽기를 함께 살피는 게 좋고, 반대로 잘 죽기 위해서도 잘 살기를 늘 성찰하는 게 좋다 싶다.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과 죽음을 외면하는 삶, 이 둘은 하늘과 땅 차이”(서명원 신부)다.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은 곧바로 삶의 질을 생각하는 삶이 된다. 유한한 삶이기에 삶이 더 소중하고, 소중한 것은 아끼기 마련이고, 아까운 것은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 마련 아니겠는가. 말초적 욕망에만 끄달려 내 삶의 시간들을 함부로 마구잡이로 탕진하는 삶이라면 좋은 삶이 되기 어려우리라. 인간 존엄을 생각하는 삶, 좋은 삶, 질이 높은 삶은 궁극적으로 죽음과의 연관 속에서만 가능하리라. 

안락사라는 화두
이런 화두의 한복판에 안락사 문제가 있다. 안락사는 존엄사요 지력사. 태어나는 건 내가 선택 결정한 게 아니지만, 죽음은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내 삶을 존중한다면 내 죽음도 존중하겠다는 뜻이다. 그건 나의 권리이자 동시에 책임이자, 보편적 인권의 한 자락이라는 생각이다. 
안락사를 허용해야 할까. 이 문제는 아직도 인류 사회가 제대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보수적 생각과 진보적 생각이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는 영역이다. 세계관 인간관 역사관까지 다 동원되는 현장이니 그 귀결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또 그래야 하고. 
안락사(Euthanasia)는 영어나 이를 번역한 우리말이나 모두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불치병을 앓는 말기 환자가 일관성 있게 요청할 경우 의사가 엄격한 지침에 따라 환자를 고통없이 죽게 하는 것이다. 1993년 네덜란드 의회는 인류 최초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생명윤리에 근거해 볼 때, 안락사 허용 문제는 자율원칙과 간섭원칙의 충돌 및 조정 문제다. 당사자의 자의적 동의가 있으면 안락사는 정당하다는 게 자율원칙이고, 함께 사는 사회에서 한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므로 공동선을 확보하고 공동악을 막기 위해서는 남의 행동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게 간섭원칙이다. 개인의 자기선택권을 어디까지 허용하느냐는 문제다. 어떤 사람이 생사를 선택할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자의로 죽겠다고 확고히 결심한 경우, 이런 자의적 안락사는 본인의 권리가 된다. 그러나 본인이 동의하기만 하면 그를 죽이는 ‘살인’도 정당할까. 마약을 해도 놔둬야 할까. 나아가 한 사람의 자의적 결심도 그게 100% 자의적일 수 있을까. 간섭원칙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다. 

자율원칙 간섭원칙
그런데, 간섭해야 한다면 그 주체는 누구인가. 네덜란드 의회가 자의적 안락사를 허용했을 때, 교황청이 가장 걱정하고 나선 것도 이 대목이다. 교황청은 어떤 안락사든 이는 자칫 반(反)자의적 안락사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사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도 이런 점진적 과정을 거쳤다. 가랑비에 옷 젖듯 어어~하는 사이에 대량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비(非)자의적 안락사 문제도 있다. 신체나 정신에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건 정당할까. 뇌사 상태의 경우는 어떤가. 생명지상주의와 공리주의가 충돌한다. 
‘안락사 원조’ 하면 미국 의사 잭 케보키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죽게 돕는 게 자기의 의무라며 130명의 안락사를 도와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의사가 돕는 자살’을 합법화하자며 ‘죽을 권리’ 운동을 벌인 그는 “죽는 건 죄가 아니다”고 외쳤다. “내가 환자를 돕는 목적은 죽음을 야기하는 게 아니었습니다....내 목적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끝내는 것은 처벌 대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비단 안락사 뿐만 아니라 생명과 고통과 죽음은 어쩌면 인류가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얼마든지 해 볼 수 있는 문제다. 죽음 문제를  꼭 어둡게만 볼 건 아니다. 얼마든지 밝게 대할 수 있다. 당장은 꺼림칙하더라도 가끔 죽음과 직면해보는 삶, 그런 삶도 꽤 멋질 것 같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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