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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나는 착한 사람일까

20221107일 (월) 15:5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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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사실 복잡한 인간 심사를 두고, 그 선악을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주변을 보라. 선한 사람도 많고 나쁜 사람도 적잖다. 또, 선한 사람이 악한 짓을 할 때도 있고, 악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할 때도 있다. 늘 천사같은 이도 있고, 하는 짓마다 못된 짓만 골라하는 자도 있다. 세상에는 테레사 수녀부터 히틀러까지, 그러니까 천사부터 악마까지 다 살고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원래 인간 본바탕은 어떨까. 원래는 선하게 타고났는데 세파에 시달리다가 끝내 그 선한 심성이 왜곡되어 악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즉 악행은 실수나 오판 탓이지 그 본심은 아닌 게 아닐까. 사실 이게 성선설 성악설 같은 동양 인성론의 요체다. 맹자는 원래 사람은 착하다고 보았다. 모르는 애기라도 그 아이가 뽈뽈 기어가다가 우물에 빠질 위기에 처하면 어느 누가 그 아이를 못 본 채 하리오. 다만 생각없이 살다보니 외부 사물에 자극받아 그 선한 본성이 흐트러져 욕심과 공격성이 나오는 것이라고 맹자는 보았다. 순자는 달리 보았다. 욕망과 이익을 쫓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다. 교육과 예(禮)를 함양해 인간의 야만성을 계도해야 사회 질서와 평화가 이룩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잠깐, 인간의 원래 본바탕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있다고 해도 그게 다 똑같을까. 혹 그게 각자 다르다면 나는 어떨까. 선할까 악할까. 

선이란 게 뭘까
선이란 게 뭘까. 사전적 정의를 보면, 선은 잘된 것, 어떤 기대에 부응하는 것, 완전한 것,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등이라 한다. 이 가운데 어떤 선의 개념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선의 구체적 내용이 달라지겠다. 서양철학자들만 봐도, 플라톤은 불완전한 이 세계가 끊임없이 접근해가려 하는 이상적인 세계, 그게 선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존재가 고유한 본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을 선이라 했다. 또 에피쿠로스는 행복이나 쾌락을 선이라 했고, 에피쿠로스와 같은 헬레니즘 철학으로 묶이는 스토아학파는 선을 자연의 보편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라 했다. 칸트는 신성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며 동시에 순순한 도덕적 의도가 선이라 했는가 하면 공리주의에서는 유용성이야말로 선, 즉 좋은 것이라 했다.(현대는 공리주의가 대세다.) 무엇이 선인가에 대한 답은 실제 삶의 원리와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므로, 삶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듯 선이나 행복 또한 그러하다. 삶 행복 선 같은 관념의 배경에는 세계관 인간관 도덕관 인생관 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는 규범의 문제고, 관점의 문제다. 이 글에서는  선을 그냥 좋은 것 착한 것, 즉 나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 정도로 이해하자. 

악의 뿌리
악도 마찬가지다. 유동적이고 상대적이다. 사탄같은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몰라도 최소한 철학의 세계에서는 사탄의 자리는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분명 악이 횡행한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악도 그 속성에 차이는 있다. 모르고 저지르는 악, 알고도 저지르는 악, 선을 위장한 위선적 악 등등. 인간에게는 분명 공격적 본능(약자를 괴롭히고 싶음)이 있고, 파괴본능, 죽음본능 따위도 있다. 우월감 과시욕 등도 거든다. 앞뒤 없는 이기심, 시샘이나 질투, 악행에서 느끼는 쾌감 등도 무시 못한다. 자연과학, 특히 동물행태학이나 사회생물학 등에서는 선악이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생존본능, 즉 이기적 유전자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은 사회의 억압적 구조, 즉 열악한 사회적 조건에 선악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신학에서는 인성에 주목한다. 애당초 신의 명령을 어긴 '원죄'가 원흉이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다. (철학에서의 논의는 너무 복잡하므로 다음 기회로 미룬다.) 암튼 악도 참 복잡한 개념이니, 역시 이 글에서는 나와 우리의 삶을 훼손하고 방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 그 정도로 해두자. 

선악을 넘어
선악을 이리 본다면 인간 본성은 선도 악도 아닐 수도 있겠다. 복잡한 인간의 본성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그러니 선악이라는 단일 프레임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맹자 시대에도 이런 견해를 고불해(告不害)라는 이가 주장했다. 본성이란 선한 것도, 선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본성은 물과 같아서 물길을 동으로 트면 동으로 흐르고, 서로 트면 서로 흐른다고 말했다. 세태에 따른다는 말이겠다. 사실 인류사회가 선악을 논하는 것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살면 선악이라는 말이 무슨 상관일까.(물론 쓰나미 같은 자연악도 있겠다.) 인간은 선도 악도 아니고, 오히려 선한 게 이익이 될 때(생존과 자기확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지, 물질적 이익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는 얼마든지 선해지고, 악한 게 이익이 될 때는 또 얼마든지 악해진다. 
물론 한 개개인을 볼 때는 성인 반열에 오른 천사 같은 이도 있고, 연쇄살인범같은 악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개인 의지의 결과지, 인간 본성의 파생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 사람 대다수는 사실 선하다. 본성이 선해서라기보다는, 생존 게임에서 룰을 어기면 결국 내 손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사익만을 쫓다가는 결국 사회에서 왕따 당한다는 걸 부지불식간에 알고 있기에 함부로 나대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선하게 행동한다. 남의 눈치도 보고, 세상의 평판에도 신경을 쓴다. 대부분의 사람은 체면도 차리고 염치도 차리며 산다. 

악의 평범성
이렇듯 한 사회는 도덕적 기준이란 걸 만든다. 문화의 핵심이다. 그 기준은 종교 전통 관습 같은 다양한 문화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 그런 에토스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 도덕기준이 좀 높은 사회도 있고,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세상 기준을 내면화하며 산다. 사람의 의식은 대부분 사회의 반영이다. 그러니 좋은 세상에 살면 좋은 사람이 되기 쉽고, 거친 세상에 살면 자신도 모르게 거칠어진다. 유전자가 아무리 이기적이고, 목사님이 아무리 '원죄'를 역설해도 결국 가장 핵심적으로는 '인간은 본성보다는 환경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집단적 차원에서는 분명 그러하다.  
그러니 선악이나 도덕 문제의 핵심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에 있다 하겠다. 이타적인 사람을  추앙하고, 도덕과 예의를 가르치고, 정의와 불의를 따지고, 좋은 제도나 사회 시스템을 논하는 이유도 다 여기 있다. 서로가 질서와 예의를 지키고, 배려도 좀 하고, 실수에 대해서는 사과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과, 나만 살겠다고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빼앗고 속이고 거짓말 하고,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다들 그러고 살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사람들이 설쳐대는 세상은 엄연히 그 끝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착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은 세상, 얌체와 폭군이 자연도태 되는 세상, 극단적 이기와 불의와 증오와 차별과 편견과 폭력이 종식되는 세상, 전쟁과 살육과 학살과 남 것 빼앗기가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은 애당초 불가능한 걸까. 협동과 자발적 희생과 공공성을 앞세우는 일이 나에게도 직접적 즉각적 도움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 말이다. 어차피 유토피아는 환상이겠지만.   
나는 어떤가. 그런 세상을 소망하는가. 나 혼자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철학자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시사를 한다. '악의 평범성'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건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는 데서 나온다.” 자기가 무슨 일을 행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자, 생각이나 성찰하지 않는 자들이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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