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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에피쿠로스를 아시나요

20221121일 (월) 08:33 입력 20221121일 (월) 08: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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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인류문명이 자의식을 가진 이래 사람은 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한 세 가지 근본 질문을 해왔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좀 헐렁하게 생각하면 사실 이 세 질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묶을 수 있다. 동물은 그냥 살지만, 사람은 생각하며 산다. 모든 생각의 궁극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착된다. 물론 생각한다고 반드시 잘 살아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은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고, 잘 생각한다면 그만큼 더 잘 살게 될 확률도 높아진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격이나 존엄성은 좀 더 지켜진다는 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는 두 가지 함의를 같이 가진다.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다분히 당위성을 함축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사는 게 더 좋은가라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는 질문이다. ‘착하게 살아라는 전자를 대변하고, ‘너 자신으로 살아라는 후자를 지칭한다 하겠다. (윤리학에서는 전자의 입장을 도덕주의라 하고 후자 입장을 자연주의라 한다. 이 둘은 화해하기가 쉽진 않다.)

어느 입장이든 삶의 궁극 목적은 행복이라는 개념으로 모아진다. 인류 지혜는 숱한 행복론을 낳았지만, 그 내용이 다양한 것도 이런 입장의 차이에서 연원한다. 그래도 그 각각의 바탕에는 대개 행복방정식이라는 하나의 정식이 깔려 있다. , 행복은 갖고 싶은 것을 분모로 하고, ‘갖고 있는 것을 분자로 하는 분수식이다. 그래서 행복하려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늘리는 방법과, 갖고 싶은 것을 줄이는 방법, 둘이 있게 된다. 현실적으로 대개 우리는 이 둘을 적당히 조합해 만든 자신만의 행복함수로 살아간다. 이 행복함수 만들기에 어느 정도 성공하면 꽤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고, 실패하면 삶이 좀 팍팍해진다. 물론 삶의 조건은 항상 변하므로 이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어려움은 있지만 말이다.

 

세상이 이다지도

세상이 너무 급변하거나, 너무 방대하거나(글로벌), 너무 복잡하거나, 너무 경쟁이 심해, 내가 내 삶의 세계를 제대로 포섭할 수 없다고 느껴지면 인간은 무력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부지불식간에 나를 엄습한다. 삶은 팍팍해지고, 먹고 사는 게 만만찮아 지고, 세상은 잘 나가는데 나만 뒤처지고,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은 깊어진다. 뭘 해도 잘 될 것 같지 않은 세상에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대개 사람은 당대 세상의 욕망을 욕망하기에 더욱 그렇다. 좌절과 낙망과 무기력과 소외의 삶.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런 세상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 견해일까.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공의 사다리 상위 1%는 고사하고 20%에도 절대 미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늘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음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일까. 힘있고 가진 자는 더 위세를 부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룰만 만들고, 엄연한 불의도 페인트칠로 감추고, 공정이니 상식이니 하는 공허한 말들로 힘없는 자들을 현혹시키고,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어떤 정의도 팽개치는 그런 곳인가. 세상의 구조나 시스템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해도 일개 범부인 나에게는 그걸 바꿀 힘은 없다. 연대의 길도 당장은 아득하다. 역사라는 장대한 수레바퀴에 치여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한다. 위로와 격려와 치유와 희망이 필요하다. 최후의 보루다. 어디에 그런 게 있을까.

 

안빈낙도와 안심입명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사상은 개인 차원에서 고난의 인생바다를 무사히 건너는 길을 대략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안빈낙도(安貧樂道), 다른 하나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이다. 둘 다 현실을 개혁하려는 투쟁적 입장은 못 되는, 다소 소극적 도피적 방편이기는 하지만, 세상이 너무 기괴하게 돌아가고, 나는 여리고 연약하며, 함께 맞잡을 손은 잘 보이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지. 그러니 그 소극성을 무조건 나무라기는 좀 그렇다. 사실 삶이라는 게 좀 역설적인 경우도 있어, 외형적 소극성이 항상 무력한 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니 더욱 그러하다.

암튼, ‘안빈낙도는 말 그래도 가난에 자족하고, 무리없는 소소한 즐거움이나 추구하자는 삶의 태도다. 나물 먹고 물만 마시며 살아도 죽진 않으니, 생존경쟁에 너무 시달리지 말고 한 발 물러나 적게 먹고 적게 갖고 대신 맘편히 삶을 즐기며 살자는 그런 자세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큰 뜻(부나 권력)을 세워 이름 드날리고 위세 떨치고 잘 먹고 잘 살려다 인생 망친 이가 한둘이냐. 애당초 찬물 마시고 속 차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한편 안심입명은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안빈낙도처럼 소소한 행복을 즐긴다기보다는 차라리 완전히 마음을 비우는 길이다. 괜히 사소한 즐거움 따위를 쫓다가는 더 큰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를 두고 우주적 운명에 순종하며 사는 게 지혜다. 삶의 고통과 죽음의 허망, 그 모든 게 다 언젠가는 끝날 한 편의 연극 아닌가. 그렇다면 주어진 운명대로 자기 역할이나 충실히 수행하는 게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현명한 길이다. 지나가는 행인 1’주인공을 하려 난리를 치는가. 왜 고난을 자초하는가.

 

스토아의 아파테이아

알렉산더 왕이 만든 헬레니즘 시대를 들어보셨으리라.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왕이 동방 정복전쟁을 펼친 걸 시작으로 해서(기원전 334)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멸망한 시점(기원전 30)까지를 말한다. 학자들마다 시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략 알렉산더 왕의 원정과 그 영향력으로 이룩된 시기라 보면 되겠다. 세상은 하나(사해동포)고 대도시는 번영하며 교역이 활발해 물질적 풍요도 구가한 시절이다. 그러나 입신양명에서 밀려난, 아니 애당초 꿈도 꿀 수 없었던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에게는 살기 만만찮은 세상이었다. 물가는 연일 치솟고 일자리는 팍팍했고 과거 고향마을에서 느끼던 온정은 온데간데없다. 염량세태와 나의 삶이 괴리가 심했던 시절이다. 마치 지금의 세계화가 내 삶이 아니듯.

이 시대를 풍미한 사상도 둘이다. 에피쿠로스 사상과 스토아 사상이다. 크게 보아 에피쿠로스는 안빈낙도에, 스토아는 안심입명에 부합할 수 있다. 이들의 인생관 행복관만 잠시 들여다보자.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를 모토로 내세운다. 흔히 쾌락주의라 번역되지만 오해 소지가 있다. 오히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주의가 더 정확하다. 인생에 무슨 큰 의미 따위는 없다. 그냥 삶의 즐거움이나 추구하라. 그러나 큰욕심은 절대 금물. 지혜로운 자는 절제할 줄 안다. 그들은 평등공동체를 만들어 서로의 힐링을 부축했다. “물과 빵만 있으면, 신도 부럽지 않다던 에피쿠로스는 실제 그리 살았고, 가끔 치즈는 먹었다 한다. 매일 먹으면 오히려 맛이 없으니 그랬다던가.

이에 비해 스토아는 아파테이아를 내세운다. 평정심, 부동심 정도 되겠다. 기쁨 슬픔 괴로움 같은 흔들거리는 마음을 제어하라. 감정에 휘둘려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다 놓고 비워라.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배역에 충실하라. 그러나 연기는 연기일 뿐. 메소드 연기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는 착오를 범하지 말라. 모든 정념에서 초연하라.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니 이를 냉정히 직시하라. 그리고 이런 초연함을 발판 삼아 내면의 힘을 길러라. 불굴의 의지로 의무에 충실하고 이웃에게는 자비심과 동포애를 가져라. 너는 우주적 운명의 존재임을 자각하라. 그게 행복의 길이기에 그렇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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