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사세요~>
또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선거는 아주 중요한 행사다. 내 삶에 직접적이고도 큰 영향을 미치기에 주인된 국민은 ‘하인’을 잘 뽑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인이 주인행세를 해서 내 삶을 축낼지도 모른다.
- 중앙선거관위원회 정책선거 홍보 광고.
예견치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소중한 우리의 일상을 굳세게 이어가고 있다.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아 서로 격려하는 중에, 이웃을 걱정하고 도우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많이 들려온다. 간혹 진상들도 나타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은 참 괜찮다는 자부심이 인다. 세계가 칭찬한다 하니 듣기 좋다. 특히 위기의 최전선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대구 경북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위기 속에서도 일상은 꿋꿋이
여야 각 당도 국가적 재난 극복에 힘을 모으면서도, 국민의 표심을 얻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치권 일각에서는 몇몇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 걱정보다는 자기 걱정을 더 앞세우는 모습들을 연출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 다른 시비거리를 제공할까봐 구체적 사례를 들진 않겠다. 다만, 국가적 위기상황을 상대방 흠집내기에 이용하려는 터무니없는 정치공세가 한편에서 있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헤아리지 않는 일방적 강변들도 있었다. 이를 부추기고 이에 편승하는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것도, 종교계 한켠의 어리석은 집단이기주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정치가 국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걱정해야 하는가 싶어 안타깝다.
말처럼 쉽지않은 선량뽑기
그러니 이번 선거에서는 과거보다는 좀 더 좋은 사람들을 뽑아야 한다. 우리 정치가 참 많이 발전해왔지만 그래도 갈 길은 멀다. 최소한 정치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자는 가려내야 할 텐데, 말그대로 선량(選良)을 뽑아야 할텐데, 사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누가 그런 자일까.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대개 세 가지 준거틀로 표심을 결정한다. 당적, 인지도, 정책이다. 대의정치는 정당정치이므로, 당적은 분명 합리적 기준이다. 하지만, 아직도 엄존하는 지역감정과 왜곡된 이념편향 등에 휩쓸려 00당이면 무조건 찍는 몰주권적 행위는 불식돼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특정정당의 후보 공천이 완벽하다 할 순 없다. 비록 내가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 하더라도, 내 선거구의 후보가 괜찮은 자인지 눈밝은 ‘주인’이 걸러줘야 한다.
눈밝은 주인이 걸러줘야
인지도도 그렇다. 명불허전이라는 말도 있듯, 어떤 사람이 유명하다면 다 그 이름값을 할 만한 뭔가 행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명도 분명 있고, 또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인간 됨됨이야 쉽사리 안 변하지만, 사회적 행동양태는 표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예전에 잘했다고 계속 잘하리란 보장은 없다. 후보의 히스토리를 잘 살펴야 한다. 언제 어느 순간 어떤 결정을 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정책이다. 사실 원론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공약이 공약(空約)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게 꼭 잘못된 것은 아니다. 공약이 다 실현되는 세상은 없다. 또 다 실현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러니 투표에서는 기본적인 정책 취지를 살펴보는 수준에서 판단하자. 그리고 역설적으로, 실현가능하고 주민복리에 도움에 되는 정책이라면 어느 후보든 당선되면 자기가 실행하려 안하겠는가. 다음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그러니 정책이란 더구나 대선이 아닌 총선에서 각 후보의 정책이란 불가근불가원이다.
공심이 2%만 더 있어도
암튼, 이상은 사실 일반론이고, 두루 알고들 있는 얘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본 수준인데, 필자는 이 대목에서 후보를 살피는 또 하나의 관점을 한 번 얘기해 보고자 한다. 후보자 개인의 성품에 주목하는 판단이다. 우선 공직자는 무엇보다 공심(公心)이 있어야 한다. 많이도 안 바란다. 사심보다 공심이 2%만 더 있어도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정치적 지도층의 가장 아킬레스가 공사(公私)의 문제다. 공적 권한을 사적 이익추구에 악용한다면 결국 그 불이익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한마디로 그런 자들은 내 재산을 훔쳐가는 ‘도둑놈’이다. 모든 부정부패는 이 ‘공공의 사사화’와 같은 말이다. 권력과 이권은 담장 하나 차이다. 소위 사회적 지도층에 앉은 자들이 사리추구에 혈안이 되면, 그 다음엔 줄줄이 계층을 가릴 것없이 ‘해먹기’에 나서게 된다. 이 영역에서는 윗물이 맑아야한다는 원칙이 그대로 통용된다. 못해먹은 놈이 바보인 세상이 된다.
일도 잘해야 하지만
물론 공직자의 첫째 덕목은 일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 정책 수행능력이 있어야 한다. 공직자가 꼭 인격적으로 고매한 성인군자일 필요는 없다. 성인군자가 일도 잘하면 금상첨화지만, 그건 바라기 어렵다. 도둑놈만 아니라면 일을 잘 하는 게 공공성의 기본이다.
그런데 일 잘하는 사심주의자(사심이 공심보다 조금이나마 더 많은 이)와 일은 좀 못해도 공심이 좀 더 많은 자라면 누가 공직에 더 적합할까. 단기적으로 또 표면적으로 보면 당장 일 잘하는 자가 더 나아 보이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면 사심주의자가 더 위험하다. 일 잘해서 만든 결과물이 결국 그 자 배만 불리게 되는 꼴이 되어, 결과적으로 일을 못한 것보다 세상은 더 나빠진다.
남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그러니 공직자는 공심있는 자를 뽑아야 할 텐데, 그 분별이 쉽지 않다. 사실 그동안 유권자들은 얼마나 말에 속아왔던가.
우선 공심은 공감(共感)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여러 자질이 모여 공심을 형성하지만, 그 바탕엔 남의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공감하는 자들은 함부로 못한다. 그리고 좀 더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려 할 것이다. 세월호의 아픔을 단지 교통사고라 우기는 자들, 광주의 눈물을 괴물로 치부하는 자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이건 이념이나 법이나 심지어 도덕의 문제마저 넘어서는 공감의 문제다. 자유주의자들이 대부로 삼는 아담 스미스조차 도덕의 바탕은 동정, 공감이라 했다. (책 ‘도덕감정론’ 또는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참조)
덧붙여 하나만 더 말한다면, 한 사람을 판단할 땐 그 사람의 말에 일관성이 있나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저기 말을 바꾸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말을 꾸미는 자들이다. 그 말은 전혀 믿을 바가 못된다. 신념과 사상의 전향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공직을 감당하려는 자는 전향의 근거를 충분히 밝혀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사실 그렇더라도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을 정치권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권력의지는 공감능력과 잘 안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정치지망생들 가운데는 양자를 겸비한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눈에 띈다.
사족 한 마디. 공감능력이 있는 자,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 자를 알아보려면 사실 나 자신부터 그런 감성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민주사회 주인되기는 쉽진 않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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