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며 문학평론가였던 송욱은 만해 한용운을 “사상, 행동, 예술, 이 모든 면에서 절세의 천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그와 비슷한 인물이 있는 것일까? 간디가 그와 같은가? 간디는 독립투사였지만 시인은 아니었다. 타고르가 그와 비슷한가? 타고르는 시인이지만 독립투사는 아니다. 그러면 만해는 간디와 타고르를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한 인물인가? 설령 간디와 타고르를 합쳐보아도 《불교대전》의 저자와 같은 석학이 나오지 않음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라고 격찬했다.
33인의 민족대표를 규합해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민족 자결주의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희망을 품게 했다. 1919년 1월 27일 한용운은 천도교 인사 최린을 찾아가 국제사회의 변화를 독립의 기회로 활용할 방안을 의논한다. 한용운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인물들을 만나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참여할 33인의 민족대표를 규합했다. 만해는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가 너무 어려워서 다시 쓰려고 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공약 3장을 덧붙이는 데 그치고 말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두 시, 민족대표들이 종로 태화관에 모여들었다. 한용운은 독립을 선언하는 연설을 마치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선창했다. 훗날 잡지 《별건곤》 기자가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만해는 거침없이 “3․1운동 때 태화관에서 연설하고 만세 삼창을 한 일이다.”라고 응답했다. 만해 한용운은 민족대표 중의 대표로서 3․1운동을 이끈 중심이었고 주역이었다.
태화관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은 민족대표들을 마포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한용운은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경찰 조사가 끝나자 민족대표들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법정에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힌 한용운은 1919년 7월 10일에 <조선독립이유서>를 썼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실로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라 할 것이다.”
3․1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최고형인 3년형을 선고받은 한용운은 1921년 12월 22일 형기를 다 마치고 출감했다. 만해는 설악산 신흥사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불멸의 절창 《님의 침묵》 발간
1925년에 백담사로 들어간 한용운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무릅쓰며 한 편 한 편 시들을 쓰고 다듬었다. 한용운은 8월 29일 《님의 침묵》을 탈고했으며, 이듬해인 1926년 5월 20일 시집을 발간하였다. 시인 주요한은 《동아일보》에서 이 시집의 표제 시 <님의 침묵>에 대해 “저자의 운율적 기교 표현은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조선어의 운율적 효과를 가장 잘 나타낸 최고 작품”이라고 평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역설적 표현은 님은 떠났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님이 가고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임을 말해준다. 님이 떠났는데도 화자는 님이 떠난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상실감도 느끼지 않는다. 님이 떠난 것이 화자에게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님에 대한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과 님의 소중함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3․1운동 이후 총독부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민족 지도자들을 줄기차게 회유해왔다. 일제의 간교한 술수에 말려들어 친일파로 변신한 유명인사가 소설가 춘원 이광수였고, 시인이며 사학자인 육당 최남선이었다. 이광수는 도쿄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이었고,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문을 쓴 사람이었다.
최남선은 1급 친일파로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어느 날, 최남선이 길에서 한용운을 만났다. 한용운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빨리 걸어갔으나 최남선이 따라와 앞을 막아서며 먼저 인사를 청했다. “만해 선생, 오래간만입니다.” 그러자 만해는 단호한 어조로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었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1937년 3월에는 만주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김동삼이 옥사하였다. 일송 김동삼은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으로,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어 ‘만주의 호랑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유해를 찾아가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으나 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한용운은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가 김동삼의 시신을 업고 심우장까지 걸어와 오일장을 치렀다. 한용운은 미아리 화장터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관을 껴안고 통곡했다. 사람들은 만해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의 통치는 점차 광기를 더해갔다. 1938년 4월 총독부는 각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라고 지시했다. 일제는 사람들이 조선어로 말하거나 한글을 쓰면 탄압을 하였다. 1940년 2월에는 창씨개명 조치가 내려졌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퇴학을 당하거나 교사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벽초 홍명희가 한용운을 방문하여 격분한 어조로, “이런 변이 있소! 최린,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등이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이 개자식들 때문에 민족에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이오!” 하고 통분했다. 이 말을 듣고 난 한용운은 크게 실소하고는, “벽초, 그 무슨 실언이시오? 만일 개가 이 자리에 있어 말을 한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의할 것이오. ‘나는 주인을 알고 충성하는 동물인데 어찌 주인을 모르고 저버리는 인간들에 비하느냐?’ 하고 말이오. 그러니 개보다 못한 인간을 개자식이라고 하면 도리어 개를 모욕하는 것이 되오.”라고 말하였다.
만해 한용운의 법명 ‘용운’은 용 ‘용(龍)’ 자, 구름 ‘운(雲)’ 자이다. 1907년, 건봉사의 정만화 스님이 내린 법명의 뜻은 무엇일까? 용은 승천하여 구름을 타고 다닌다. 하늘에 사는 용은 높고 높음, 최고, 으뜸을 뜻한다. ‘용운’이라는 이름에는 큰 승려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는 의미와 함께 반드시 큰 승려가 되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큰스님 만해 한용운은 예순여섯 되던 해인 1944년 6월 29일 입적하였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이시간 최신뉴스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