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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의 천자이자 익살의 제왕, 이항복

임금 앞에서도 거리낌없고 재치 있게 농담해

20200422일 (수) 09:07 입력 20200422일 (수) 09: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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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재치로 권율의 딸과 혼인해

 

여덟 살 소년 이항복이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보니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감나무는 옆집 담 안으로 가지가 뻗어 있었는데 감들이 먹음직스러웠다. 이항복이 하인에게 감을 따서 방으로 가져오라고 하자 하인은 한참을 망설였다. 마당을 몇 차례 오가던 하인은 담 너머의 감을 따기 시작했다

 


이항복 초상화. <출처=나무위키>

 

감을 몇 개 땄을 때 옆집 하인이 험상궂은 얼굴로 왜 남의 감을 함부로 따느냐?”며 큰소리를 땅땅 쳤다

 

이항복의 집 하인이 우리 감나무에서 뻗은 가지니까 우리 집 감이지, 어째서 너희 집 감이냐?”고 따졌다. 옆집 하인은 자기네 집 마당으로 넘어온 가지에 열렸으니까 자기네 감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고 있던 이항복이 방에서 나와 옆집 하인에게 그 집으로 넘어간 감에 하나라도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옆집은 우찬성 권철 대감의 집이었다. 권철은 이항복의 아버지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었고, 나중에 영의정 벼슬까지 지냈다. 그런 집안이다 보니 하인들마저도 옆집 하인들에게 꼼짝도 못하는 처지였다.

 

이항복은 권철 대감댁 하인의 행동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항복이 권철 대감이 있는 사랑채로 가서 옆집에 사는 항복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책을 읽고 있던 권철 대감이 그래 무슨 일이냐? 어서 들어오너라.”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문살 사이로 창호지를 뚫고 주먹이 쑤욱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항복이 권철 대감에게 물었다.

 

지금 방 안에 들어가 있는 팔은 누구의 팔입니까?”

그거야 네 팔이지 누구 팔이겠느냐?”

이 팔이 대감 방 안으로 들어가 있는데 어찌해서 제 팔입니까?”

권철은 항복의 당돌한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

내 방에 들어와 있더라도 네 몸에 붙어 있으니 너의 팔이지 않느냐?”

그제서야 팔을 빼낸 이항복은 권철 대감에게 또 물었다.

저의 집 담을 넘어 대감댁으로 뻗어온 감나무 가지는 누구네 것이옵니까?”

권철은 이항복의 무례한 행동에 무슨 까닭이 있음을 느꼈다.

지혜가 뛰어나다고 하더니 과연 보통 녀석이 아니로구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권철은 항복의 물음에 대답했다.

가지는 비록 우리 집으로 넘어왔지만 뿌리와 줄기는 너희 집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의 집 감나무 가지가 틀림없느니라.”

그럼 대감댁으로 뻗은 감나무 가지에 열린 감은 누구네 것입니까?”

그야 물론 너의 집 감이지.”

그런데 왜 대감댁 하인들은 자기네 거라며 그 가지에서 딴 감을 내놓으라고 합니까?”

허허, 그런 일이 있었더냐? 내가 단속을 잘못해서 그리 되었으니 모두 내 잘못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마!”

 

어린 항복의 재치에 탄복한 권철은 아들에게 이항복을 사위 삼으라고 권하였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이름을 떨친 도원수 권율의 딸과 19세에 혼인을 하였다.

농담의 천자라고 불린 이항복과 장인인 권율은 서로 희롱하기를 좋아했다. 더운 여름날 입궐하게 된 이항복이 장인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몹시 더워 장인께서 견디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버선을 벗고 신을 신는 게 좋겠습니다.”

 

권율은 사위의 말이 옳다고 여겨 버선을 벗고 신을 신었다. 장인과 함께 대궐에 들어간 이항복이 왕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날씨가 몹시 더워 나이든 재상들이 의관을 갖추고 있기가 어려울 듯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신을 벗도록 해주시옵소서.”

 

선조는 매우 옳은 말이라고 응답했다. 그리하여 영의정부터 신을 벗게 되었는데, 권율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이항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조는 권율이 임금 앞에서 신을 벗기가 어려워 망설이는 줄 알고 내관에게 신을 벗겨 주라고 명했다. 그런데 신을 벗기고 보니 맨발이었다. 권율은 도포자락으로 발을 가리고 엎드려 아뢰었다.

 

이항복에게 속아 이리 되었나이다.”

 

임금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여러 신하들도 배를 움켜쥐었다.

 

이 이야기에서 이항복이 장인 권율에게 한 것처럼 남을 웃기려고 일부러 하는 우스운 말이나 행동을 익살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재치가 뛰어났던 이항복은 익살의 대가답게 평생에 걸쳐 숱한 일화를 남겼다.

 

한음 이덕형과 평생 동안 우정을 나누어

 

임진년에 왜적들이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와 마침내 한양에 멀지 않은 곳까지 이르자, 선조는 크게 근심을 하였다. 이때 이항복이 반열에서 나와 명심보감 10만 권만 있으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까닭을 묻자 항복이 답하기를,

제가 옛날 아직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을 때, 명심보감만 읽으면 잠이 왔습니다. 그러니 명심보감 10만 권을 남대문 앞에 쌓아 놓으면 왜적들은 이를 읽고서 모두 잠이 들 것입니다. 이때 그들을 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크게 웃었고 선조는 잠시 시름을 잊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항복과 율곡 이이 그리고 송강 정철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화제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무엇인가 하는 데 이르렀다. 이에 율곡은 달밤에 초당에서 글 읽는 동자의 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고 하였고, 송강은 산골에 흐르는 물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은 웃으면서 저는 대감들과 취향이 다릅니다.”라고 하고서 캄캄한 방 안에서 여인이 옷 벗는 소리가 가장 좋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월사(月沙) 이정구는 조선 중기 한학 4대가의 한 사람이다. 어느 날 항복이 월사의 집을 방문하자 월사는 선배인 항복에게 제가 호를 白沙라고 지었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항복이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니 그 호가 너무나 좋았고, 또 탐이 났다. 이에 그는 거짓으로 크게 화를 내면서 백사는 어제 내가 지은 호인데, 어찌하여 그대가 감히 이 호를 쓴단 말인가?”라고 하자 월사는 크게 송구하여 백사라는 호는 항복에게 올리고 다시 호를 지었는데, 그것이 月沙라고 한다.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평생 동안 친구로 지내며 우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재치 있는 장난을 잘 쳤는데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한번은 대궐에서 오성과 한음이 서로 내가 아비라며 농담하는 것을 본 선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체 누가 아비이고, 누가 아들이오?”

임금의 우스갯소리에 오성과 한음은 서로 더욱 자기가 아비라고 우겼다.

그럴 것 없이 오늘은 내가 아비와 아들을 확실하게 가려 주겠소.”

 

선조는 신하에게 종이쪽지 두 장에 한자로 아비 부자와 아들 자자를 쓰게 했다. 그리고는 오성과 한음에게 뒤돌아 앉으라고 하더니 그 종이쪽지를 접어서 두 사람 등 뒤 바닥에 하나씩 놓았다.

 

, 이제 돌아앉아서 앞에 놓인 종이를 한 장씩 집어서 펴 보시오.”

 

오성과 한음은 얼른 종이쪽지를 집어 펴 보았다. 그러자 한음이 먼저 제가 아비입니다.” 하며 아비 부자가 써진 종이를 펼쳐들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오성은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선조가 이상해서 물었다.

 

그대는 아들 자자를 집었을 텐데 뭐가 좋아서 그리 싱글벙글하오?”

 

오성은 무릎 위에 펴놓은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무릎 위에 앉혔으니 이 아비의 마음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오성의 재치 있는 농담에 선조는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고 말았다.

이렇듯 이항복은 농담의 천자이며 익살의 제왕이었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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