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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새 세상에서는 국회를 민회라 부른다

20200615일 (월) 06:0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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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 사는 세상이요


21대 국회가 개원됐다.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도 원 구성을 둘러싸고 여야 신경전이 팽팽하지만 어쨌든 국회는 출범했다. 177석 거대여당은 나라살림을 잘 해야한다는 책임이 무겁다. 코로나 19 방역은 물론, 코로나로 흔들리는 민생경제도 살려야 한다. 게다가 검찰개혁 언론개혁 등 개혁입법도 시대적 요청이다. 이를 위해선 어떤 형태로건 협치가 불가피한데, 협치와 책임정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거대 여당이 현안들을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또 야당도 비록 당세가 많이 위축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100석이 넘는 의석을 가진 만큼 건강한 견제와 대안 제시를 얼마나 잘 해 낼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아직 당내 혁신 문제도 제대로 가닥을 못잡고 있는 형편에, 나라살림에 얼마나 전향적 기여를 할지, 이게 또다른 관전 포인트다. 

일하는 국회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적으로도, 범 글로벌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 놓여있다. 눈앞에 놓인 현안들도 잘 풀어내야 하지만, 코로나 이후의 큰 그림도 그려내야 한다. 밥 먹고 사는 민생문제를 해결해야 함과 동시에 인류사적 새 세상 모델과 시스템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코로나 방역에도 모범이 되고, 그 와중에도 총선도 잘 치러냈다. 경제성장 전망에서도, 비록 마이너스이긴 하지만, OECD 나라들 가운데 가장 하락폭이 낮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1대 국회는 그런 만큼 더 ‘일하는 국회’가 돼야 한다. 

안팎 이런 정세 속에서 출범하는 21대 국회에 대해 여기저기서 기대와 당부가 크다. 이런저런 구체적 현안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켜보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우리 국회의 좀 더 근본적인 바탕에 대해 몇 마디 보탤까 한다. 

쓸데없는 권위의식
총선이 끝난 지난 4월 하순. 피아니스트이자 시각장애인인 미래한국당 김예지 당선인의 안내견 ‘조이’가 국회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국회법은 회의 진행에 방해되는 물건이나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딱히 회의장 내 동물 출입에 대한 규정은 없다. 지난 2004년, 17대 국회 때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정화원 의원도 시각장애인인데, 국회 개원에 앞서 정 당선인 측은 안내견과 같이 본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국회 측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결국 정 의원은 보좌진의 팔을 잡고 들어갔다. 다행이 이번 김 당선인의 경우는 안내견의 회의장 입장이 허용됐다. 

당시 언론들은 이 문제를 두고 장애인 처우 문제로 인식했지만, 필자는 이 보다는 우리 정치권의 쓸데없는 권위의식이 더 핵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 문제는 국회사무처의 소관사항이고, 의원들과는 직접 상관은 없는 문제다. 하지만 사무처든 의원들이든, 이 문제의 밑바닥에는 넓게 볼 때 여의도 정치권 일반이 국회에 대해 갖는 기본인식이 깔려있다. 국회 회의장에 동물이 들어오는 건 어쩐지 우리 권위가 손상되는 것같은 그런 권위의식 말이다. 

다행히 17대 때보다는 그런 의식이 많이 불식돼, 21대 때는 안내견이 회의장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저간의 사정에서 그 권위의식은 충분히 읽힌다. 17대 때는 왜 불허했으며, 이번에도 문제 소지가 있다면 사전에 전문가들과 관련인들이 함께 모여, 과연 안내견의 회의장 입장이 회의에 방해가 되는지 안되는지를 미리 가려보면 될 일을 두고, 잠시나마 사단을 만든 건 그다지 개운하진 않다는 말이다. 

특권은 얼마나
공적 영역이 일정 권위를 지녀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권위의식은 구시대 유물일 뿐이다. 이런 쓸데없는 권위의식의 근저에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지나친 특권 부여도 한몫 한다고 본다. 불체포특권이나 면책특권같은 것은 간혹 이를 왜곡되게 이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자유로운 의정활동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소소한 것까지 다 합치면 200여 가지에 이른다는 각종 특권들이 의정활동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여러 정치선진국의 의원들에게는 없는 우리 의원들만의 특권은 이제 좀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특권이 문제가 되는 건, 이게 우월감을 부추기기 쉽기 때문이다. 이 우월감은 ‘나는 니네들과는 다른, 좀 높은 사람’이라는 의식을 자신도 모르게 조장하기 마련인데, 가끔 청문회 현장중계 등을 보면, 국민 일반 의식 수준에도 못미치는 ‘덜 떨어진’의원들을 목격하지 않는가. 더욱이 이런 우월감은 지배욕을 부추겨 자신도 모르게 국민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태도를 연출하게 만든다. 이런 욕망들은 국민에게나 자신에게나 폐해를 낳을 뿐이다. 하기야 그 맛에 의원나리 하려는 자들도 없다 못할 것이다. 선거에서 떨어져 의원직을 잃으면 그 상실감에 힘들어 하는 이들도 꽤 있다고 하니, 권력의 맛을 누려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그저 그런가 할 뿐이다. 

권력은 나눠야
세비 문제도 그렇다. 일반 국민들로서야 세비가 얼마여야 적절한지 전문 지식은 없지만, 우리 의원들 세비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고, GDP 대비로는 세계 1등이라 하니, 이에 대한 국민들의 일반 감정이 도통 틀린 건 아닌 모양이다. 보좌진에 지원경비까지 합하면 의원실 한 방에서 쓰는 국민세금이 한 달 몇 억에 이른다면 일을 그만큼 하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보다 적은 돈으로도 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은 불가능할까.  

국회의원이 나라살림을 위해 헌법에 정한 권력을 합당하게 행사하는 것은 온당하다. 다만 그들 스스로가 만든 특권과 특혜가 국민 정서에도 지나치다면 이는 고쳐야 마땅하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권력은 가능한 한 분산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일을 하기 위해서는 권한을 모아줘야 하는 측면도 있다. 책임만 제대로 물을 수 있다면 강력한 권력이 당장 일을 하는 데는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사후 책임만으로 이를 견제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엄중하다. 집중된 권력은 결국 왜곡되기 마련인데, 필요악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더라도 이는 시스템에 집중시켜야지 한 개인에게 집중해서는 절대 그 폐해를 막을 수 없다. 이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또한 증명한다. 

의원도 소환돼야
요새는 아무래도 예전에 비해 의원들의 평균 공적 의식 수준이 많이 나아졌다 하겠다. 이는 민도의 향상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러나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직을 한 개인의 선의나 각성에만 맡길 순 없다. 제도적 개선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그 칼자루를 그들이 쥐고 있다는 점인데, 이 대목에서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를 한 번 떠올려본다.

지자체 단체장들은 물론 임기 중 대통령도 탄핵될 수 있도록 한 헌법질서가 유독 국회의원들에게는 관대한 측면이 있다. 필자는 이번 21대 국회에서 국민에 의한 의원소환제가 마련되기를 강력 촉구한다. 스스로 제 머리 깎는 일도 요새는 가능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제 머리 못깎는 의원이 바로 소환대상이다. 공직을 사리사욕을 위한 방편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한 자들이다. 의원직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릴 우려를 말들 하지만, 이는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을 얕잡아 본 이야기다. 암튼 의원소환제는 국민의 권리다. 대리인이 주인의 뜻을 저버리면 다시 불러들이는 건 상식이지 않은가.

국가주의 냄새가
이와 관련해 이런 생각도 해본다. ‘국회’를 ‘민회’라 고쳐 부르자. 국회라는 말에는 국가주의, 지배욕, 군림하려는 욕망 등의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심지어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냄새마저 풍긴다. 말은 우리의 의식을 부지불식간에 규정한다. ‘국회’란 말을 처음 채택할 때는 그 말이 적당했는지 몰라도 이젠 아니다. ‘민회’. 백성들의 대표가 모여 나라살림을 걱정하는 회의체. 필자는 이 말이 더 맘에 든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 하신지. 매일 신문 방송에서 국회 아닌 민회란 말을 들으며, 의원들의 언행을 지켜본다면 새로운 인식지평이 열릴 것 같지 않으신가.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참 많다. 그들은 늘 자신만을 내세우고 자신의 말만 하려 든다. 그들이 설치는 세상은 갈수록 시끄럽고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세상에는 못나고 힘없는 자들이 더 많다. 이들은 그냥 묵묵히 살아간다. 간혹 자신같이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힘 닿는대로 돕고, 또 도움을 받고 그렇게 말이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이 가운데 누가 진정 삶과 역사의 주인공일까. 나는 잘났을까, 못났을까.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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