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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에 다혁당을 조직한 학생운동가

[강북 위인전] (1) 권쾌복

20160127일 (수) 16:0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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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우리 지역을 기반으로 목숨 바쳐 조국을 위해 싸웠던 역사 속 인물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경북 칠곡군 칠곡읍이 대구시 북구로 편입된 만큼, 경북 칠곡에서 출생하고 대구에서 활동했던 인물 위주로 소개한다. 국가보훈처 국가유공자 목록에서 칠곡 출생인 인물을 찾아보니 80명이 검색되었다. 오늘은 12번에 걸쳐 진행될 ‘강북 위인전’의 첫 번째 순서로 애국지사 권쾌복의 이야기를 담았다.

 

 

 

◆ 대구사범학교에서 다혁당을 조직하다

 

애국지사 권쾌복(權快福)은 1921년 2월 2일, 지금은 구미로 편입된 칠곡군 인동면 시미동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2월, 권 지사가 21살일 적 대구사범학교(현 대구교육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같은 학교에 다니던 문홍의, 배학보 등 15명과 뜻을 모아 항일결사 ‘다혁당’을 조직했다. 권 지사는 여기서 당수 겸 예술부장을 맡았다.


학생비밀결사, 다혁당은 1939년 7월의 대관작업장 저항사건 이후, 이 학교 학생들은 일제에 대한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충돌이나 산발적인 저항보다는 반일민족의식의 조직화가 장래에 더욱 필요한 것으로 인식해 결성된 조직이다.


다혁당은 앞서 대구사범학교에서 조직되었던 비밀결사 ‘문예부’와 ‘연구회’의 항일정신을 계승했다. 문예부와 연구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상 각각 문예활동과 학술연구를 표방한 단체였다. 이 두 단체는 문예작품의 발표 및 감상, 여러 부문의 학술연구발표 등을 통해 민족의식·항일정신을 고취해 나갔다.


그러나 문예부와 연구회의 학생들이 대거 졸업하게 되자, 문예부·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권쾌복 등이 2월 15일 유흥수의 하숙집에서 집회를 열고 다혁당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 현재 대구사범학교 모습

 

◆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오다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 포섭했다.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해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 등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때 권 지사도 경찰에 붙잡혀 2년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945년 8·15광복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출옥 후 권 지사는 1964년 5월 광복회 제13대 회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부인 조영기 씨와 결혼해 아들 권오인 등 2남 2녀를 두고 살다가,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2009년 12월 19일, 향년 88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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