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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되지!” 희망을 전하는 음악가

[인터뷰 공감] 음악가 노광하

20151011일 (일) 17:20 입력 20151016일 (금) 09: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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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 라이터. 노래를 부르면서 작사와 작곡도 겸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동네에서 활동 중인 싱어송 라이터 노광하(37세) 씨를 만나기 위해 지난 9일 구암동에 위치한 기타 학원을 찾았다. 광하 씨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다. 내 곡을 만들기도 하고 의뢰를 받아 작곡하기도 한다. 내 음악의 기본 뿌리는 락이다. 처음에는 헤비메탈로 시작했다. 어릴 때는 한 장르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범위가 넓어졌다. 지금은 모든 음악이 좋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려고 하고 있다. 내가 담을 수 있는 그릇에 가능한 많은 것을 담고 싶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광하 씨는 14살 때부터 한 번도 음악을 놓은 적이 없다. 피아노를 좋아했던 여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사주신 건반을 혼자 치면서 음악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당시 음악을 반대했던 부모님 때문에 교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음악이 좋았던 소년 광하 씨는 기타와 음악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꾸준히 독학으로 음악을 익혀온 광하 씨에게도 26살에 귀인이 찾아왔다. 그때 광하 씨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스승님을 만나, 음악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님은 광하 씨가 음악인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었다.


“스승님은 미8군에서 연주하시던 분인데 생계가 많이 어려워 사용하던 악기를 내다 팔고 있었다. 악기를  파는 현장에 마침 내가 있었고,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때부터 약 6개월 동안 교습비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가 회사를 다닐 땐데, 오전 5시에 일어나 오후 9~10시까지 야근 후 퇴근을 해서 선생님께 음악을 배웠다. 그 전까지는 막연히 음악을 좋아했는데 선생님을 통해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제대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선생님은 지금도 서울에서 1인 밴드로 연주를 하면서 지내고 계신다. 선생님과는 지금도 한 번씩 뵙고 있다.”

 
광하 씨가 구암동에서 기타 교습소를 연 지는 5년가량 되었다. 광하 씨는 운암지에서 락기타콘서트를 여는 등 지역 내에서도 다양한 음악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우리 학원의 원생들과 함께 운암지에서 락기타 콘서트를 정기적으로 해왔다. 다만 최근 2년 동안은 세월호 사건, 메르스로 인해 못했다. 다음에는 직접 만든 동요로 대구에서 열리는 창작동요제에 참가해볼 생각이다.”


광하 씨가 곡 하나를 만들 때 소요되는 시간은 3일가량이라고 한다. 광하 씨가 곡을 만들어 작사가에게 보내면 1~2일 내로 가사가 온다. 작곡에는 ‘그 분’만 온다면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이르면 삼십분이면 곡 하나가 뚝딱 완성된다. 반면, 음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몇 시간 동안 건반을 잡고 있어도 곡이 써지지 않는다. 어느 날은 광하 씨가 아들을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가, 갑자기 음이 떠올라서 휴대폰으로 달려가 급하게 녹음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32세의 건설가, 젊음으로 부딪히다

 

어릴 때부터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음악가를 꿈꾸었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 의해 좌절했던 광하 씨는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남부럽지 않은 건설 회사의 대리로 있었다. 광하 씨는 그때까지 음악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항상 취미로써 음악을 가까이 두고 있었다. 그러다 32세, 사내 진급 경쟁에 치여 점점 음악이 멀어지는 느낌을 받은 광하 씨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음악을 놓칠 수는 없었던 광하 씨는 그때서야 음악가로 삶을 전환하고자 마음먹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진로 변경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가족들이 반대를 했을 것이라는 기자의 예상과 다르게, 광하 씨의 아내는 오히려 광하 씨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당시 수입도 나쁘지 않았지만 안정된 생활에서 오는 만족감이 음악에 대한 간절함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땐 젊음이라는 보험이 있었으니까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어차피 회사에는 정년이 있다는 단점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내가 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좋게 봐주었다. 처음에는 수익이 줄어드니까 아내가 같이 고생하면서 보조를 해주기도 했다. 지금도 아내에게는 많이 고맙다.”

 

 


광하 씨는 음반 발매도 앞두고 있다. 동료인 박준수 씨와 결성한 밴드의 이름은 ‘이슬먹는 하마’. 기타 빼고는 뭐든지 잘했던 준수 씨가 기타를 배우기 위해 광하 씨를 찾아왔고, 인터넷에서 ‘이슬먹는 하마’로 음악 활동하고 있던 준수 씨와 마음이 맞아 함께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 지금은 첫 싱글 앨범 ‘하마 하마 하마’의 발매를 준비하고 있다. 곡의 제목은 ‘하면 되지’의 방언인 ‘하마 되지’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 다음 발표될 후속곡은 ‘하마의 꿈’. 밴드 이슬먹는 하마는 매달 한 곡씩 싱글 앨범을 발매, 총 7개의 곡이 모이면 정규 앨범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 뮤직비디오 촬영도 계획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에는 대구 명소를 찾아, 그곳에 있는 시민들과 함께 ‘하마 되지’를 외치는 모습을 담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의 곡들은 ‘하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의 창법은 담백하다. 어떠한 기교 없이 담담하게 가사를 전한다. 그의 롤모델이라는 가수 김창완을 닮았다.


“요즘은 실용음악과나 학원이 많이 생겼고 주입식 교육을 많이 하는데, 그런 것은 예술이라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교나 테크닉이 좋은 창법은 이제 식상하다. 가장 존경하는 국내 뮤지션인 김창완 씨는 가창력이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분만의 음악이 분명히 있다. 그런 뮤지션이 진정한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절대적 행복’이라고 답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통상적인 잣대에서 오는 행복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이다.


“결국 원하는 것은 행복이다. 진정한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상대적인 행복을 쫓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만 결국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절대적인 행복은 결국 음악이다. 초심을 잃지 않고 음악을 계속하면서 절대적인 행복을 쟁취하고 싶다. 그리고 봉사도 하면서 가능한 이타적으로 살고 싶다.”


밴드 이슬먹는 하마의 첫 싱글 앨범 ‘하마 하마 하마’는 10월 내로 음원 사이트를 통해 공개된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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