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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옥고를 치른 운동가, 손병선

[강북위인전] 손병선

20160203일 (수) 15:5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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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에서 태어나 만주, 대구를 오가며 활동했던 애국지사 손병선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조달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손병선 지사의 활동 배경은 3·1운동을 발단으로 한창 독립운동이 일었던 1920년대로, 국내외 무장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시기다. 특히 3·1운동 직후 조직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내는 물론, 국외인 만주에서도 독립운동 단체의 무력 항쟁이 전개되었다.

 

◆ 25살, 마을에 3·1운동이 일어나다

 

손병선(孫秉善) 지사의 본관은 밀양, 호는 청계이다. 손 지사는 왜관에서 낙동강을 넘어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위치한 칠곡군 약목면 덕산리에서 1895년 1월 12일에 태어났다. 성격이 곧고 영리한 기질을 타고나 한학(漢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칠곡군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해 활동했고, 26살 되던 1920년에 폭 넓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북만주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서병철, 박소용 등과 국내로 잠입했다.

 

 


손 지사는 임시정부의 파견원 허영원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하기 위해 대구에서 동지를 모았다. 이때 모금을 통해 2천 원 정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천2백만 원 가량의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들은 상해로 탈출을 계획했지만 미행하던 일본형사에게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그는 1921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기록에 의하면 판결 날짜는 1921년 5월 24일, 대구복심법원이 내린 죄명은 ‘공갈’이다.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인 손병선이 4회에 걸쳐 공갈, 협박하여 금원(金員)을 강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밀양에서 또… 두 번의 옥고를 치르다

 

출옥 후에도 손 지사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목적으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등과 여러 차례 연락하면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의 자금협조를 요청하는 지령서를 전달받고, 이를 김찬규, 신태식, 신석원 등과 함께 인쇄하여 경상도 내의 부호들에게 배포했다. 또, 김찬규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게 할 것을 계획했는데, 그러던 중 경남 밀양시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김찬규(金燦奎, 1864~1931) 열사는 경북 영주 사람으로, 대한제국시기에 비서승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동단’에 참가해, 주로 상류층 인사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았다. 1919년 대동단의 조직이 발각된 후, 그는 1920년 다시 ‘의용단’을 조직하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김 열사는 1924년에는 손병선 등과 함께 경남 밀양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상해 망명을 추진했는데, 사전 발각되어 1925년 2월경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31년, 6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한편, 밀양에서 붙잡힌 손 지사는 두 번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손 지사는 1926년 3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지자를 임시정부 군무총장 명의로 군정서 총무국장에 임명한다는 취지의 사령서를 작성, 인쇄하여 분배하였다’는 이유로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 2012년 6월 손병선 지사 기념비 제막식 (출처: 칠곡군)


정부에서는 손병선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1977년)과 애국장(1990년)을 추서했다. 손 지사의 기념비는 왜관읍 석전리에 있는 애국동산에 있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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