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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두 차례의 만세 운동을 일으키다

[강북위인전] 장(張) 씨 일가

20160406일 (수) 17:1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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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4월 경상북도 칠곡군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석적읍에서 두 차례의 만세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다. 장지희, 장영창을 비롯한 장(張) 씨 일가 사람들이다.

 

■ 칠곡군에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다

 

칠곡 3·1운동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들은 주민들에 의해 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을 필두로 같은 해 4월 9일까지 약목·석적 등지에서 일어났다.


먼저, 칠곡 3·1운동의 시작은 3월 12일 일어났던 인동면 진평동 만세 시위다. 대구에서 만세 시위 준비가 진행되던 3월 7일에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 이내성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을 찾아와 만세 시위를 모의한 것이 발단이었다. 임점석, 이영래 등 진평동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인동면 진평동의 만세 시위에는 약 60명의 동민이 동원되었으며 오후 8시 반에 시작해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다음날인 3월 13일 오후 4시경과 밤 9시에도 같은 장소에서 각각 20여 명, 3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고, 14일에는 계성학교 학생 김도길에 의해 오전 10시경 동민 약 40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한편, 13일에 북삼읍 숭오리 숭오교회 신자 안도수와 약목면 복성교회 신자인 김익시가 약목 장날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했으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 들켜 이루어지지 않았고, 안도수 등 6명이 체포되었다.

 

■ 석적읍 만세 운동을 주도한 장 씨 일가

 

 

 

그리고 4월, 석적읍 중리에서 장지희, 장영창 등이 도모하여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이 소식을 듣고 가담한 마을 사람까지 모두 22명이 4월 8일 밤 9시경 뒷산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날 운동에 참여한 전원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이 중 8명이 기소되었다.


24살의 꽃다운 나이로 만세 운동을 주동한 장지희는 1895년 11월 26일에 칠곡군 석적면 중동에서 태어났다. 장지희는 칠곡군에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가 청년들과 4·9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날 일경에게 붙잡힌 장지희는 5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감형하여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장지희보다 5살 위인 장영창은 1890년 10월 10일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장지희와 마찬가지로 4·9 만세운동을 주동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의 옥고를 치렀다. 장영창은 1992년에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중리에서 만세 운동이 있었던 다음날인 4월 9일, 석적읍 성곡리에서 장영조, 장병규, 장준식, 장재식 등도 시위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9~10일 이틀에 걸쳐 주민 36명과 같이 만세를 고창했다. 이 중 21명이 체포되었고, 장영조는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았다.


이 두 운동이 특이한 점은 주동한 사람들이 같은 일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장지희와 장영창을 비롯, 같은 일가의 장영남, 장영옥, 장영석, 장영희 등이 만세 시위를 함께 계획하고 참여했다.


실제로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중리와 성곡리는 인동장씨의 주요 세거지다. 인동장씨 시조는 종파에 따라 장금용, 장계 크게 두 사람으로 나뉘는데, 이 중 한 명인 장계가 현재 구미로 편입된 인동현의 남쪽 발영전에 터를 잡고, 인동을 본관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칠곡군 3·1운동은 1920년대 이후 칠곡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여러 민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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