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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긴다”

[강북위인전] 이경희

20160420일 (수) 16:2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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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나라 잃은 못난 나’라고 칭한 지오(池吾) 이경희 선생은 서변동에서 태어나 의열단 조직에 동참하는 등 대구를 넘어 전국으로,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 교육을 통해 계몽을 꾀하다

 

지오 이경희는 1880년(고종 17년) 6월 11일 지금의 북구 서변동인 경북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에서 태어났다. 경주 최씨로 조선 개국공신인 오천 이문화(烏川 李文和)의 19대손이며, 조선중기 성리학자 태암 이주(苔巖 李輈)의 11대손이다.


16살까지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 소학교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상경해 기호중학교에 입학했다.


기호중 졸업 후 1905년, 이경희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통과되자 관직의 꿈을 접고 교육계에 몸담기로 결심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겠다는 신념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경희는 고향으로 내려와 대구 협성학교의 교사가 된 동시에 안동 협동학교에도 출강하며 교편을 잡고 교육 구국에 힘썼다.


30살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09년, 이경희는 윤치호,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했다. 다음 해에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이동녕, 윤치호, 안창호, 김좌진,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고 독립군 기지 창건을 목적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데 동참했다.

 

 


1911년에는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이다. 일본은 독립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된 안명근이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날조하여 신민회원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 600여 명을 검거했고 그중 중심인물 105명은 기소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 전국 조직은 와해되었고, 기소된 105명 중 6명은 유죄가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경희는 105인 사건을 피해 중국 만주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여 장사와 노동에 종사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동시에 현지 교민들의 문맹률을 보고 중국 심양에서 ‘달신학교’와 중국어 학교를 세워 학생과 청년들을 가르치고, 야학을 개설하여 성인들을 가르쳤다.


이어 마련한 돈으로 만주 무송현에 둔전을 마련하여 다시 군자금을 만들고, 청·장년을 훈련시켰다. 1918년 12월에는 파리강화회의로 파견되는 김규식 박사 및 일행의 차비와 여비로 일부 자금을 상하이에 보냈다.

 

■ 1923년 5월, 터지지 못한 불꽃

 

1919년 국내에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후 이경희는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계획했다. 그러다 7월 지린성(길림성)에 김원봉, 김시현, 유시태 등이 찾아오자 이들과 함께 ‘의열단’ 조직에 참여했다.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폭력항쟁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실패하자 의열단은 폭력과 암살을 정의로 삼고 5개소의 일제 기관 파괴 등을 목표로 했다.


1923년에는 5월에는 의거를 계획하며 국내에 잠입했다. 그해 3월 김지섭, 김시현, 유시태 등이 중국 안둥현(현 단둥시)에서 쌀가마에 숨긴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 정, 수류탄 10발, 조선혁명선언서의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국내에 반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무기와 폭탄이 들어오자 그는 조선혁명선언서와 투항권고 격문 수백 장을 받아 경성부 시내 곳곳에 살포하고, 전국 각 도의 도지사와 경찰부에 발송했다.


그리고 이경희가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던 바로 직전, 누군가의 신고로 밀정이 따라붙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동지 12명과 붙잡힌 이경희는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테러 미수 혐의로 재판받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넘게 형을 살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석방 후에도 독립을 향한 뜀박질은 멈추지 않았다. 1927년 2월 상경한 이경희는 ‘신간회’ 발족에 참여해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를 맡았다. 그 후 신간회 경상북도 지회장, 신간회 대구부 지회장을 겸임했다. 신간회 밀양지회 조직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불심검문을 받고 밀양에서 검속되기도 했다. 그 뒤 신간회 밀양지회 산하 조직인 ‘밀양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항상 밀양경찰서와 파견된 총독부 경찰의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았다.


1939년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자 이를 거부하고 향리의 야산에 숨어 밭을 갈고 농부로 생활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일본인 도지사와 부지사 등이 사퇴하자 행정공백을 피하기 위해 8월 16일부터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와 대구 부윤(시장)을 겸직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는 현 매일신문의 전신인 남선경제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49년 12월 4일 대구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향년 69세였다. 현재 이경희의 묘소는 동변동 가람봉 산기슭에 있다.


그의 공적을 기려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광복회 대구지회 회관 앞 망우공원에는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공적비’가 설립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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