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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0220628일 (화) 12:5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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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이라는 말이다. 동물 가운데는 인간처럼 집단을 이루어 사는 생물종이 많다. 사슴이 그렇고, 늑대가 그렇고, 코끼리도 그렇고, 사자도 그렇고, 하이에나도 그렇고, 돌고래도 그렇고, 말벌도 그렇고, 개미도 그렇다. 이밖에도 수많은 종들이 무리지어 산다. 호랑이나 여우처럼 개체 중심으로 사는 종이 오히려 드물다. 무리를 지어 살면 당연히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 정서적 안정에도 좋다. 그래서 대부분 종들이 유유상종하는 쪽으로 진화했지 싶다.

무리 생활이 분명 잇점이 있지만, 세상만사 다 그렇듯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빛과 어둠, 둘은 늘 동행한다. 빛만 추구하고 어둠은 한사코 거부하는 걸 욕심이라 그런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면 괴롭게 되는 것이다. 욕심을 갖지 말자는 게 아니다. 욕심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라 그랬다. 빛을 추구하되 그 빛에는 필연적으로 어둠이 따른다는 사실을 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오히려 어둠을 맞닥뜨렸을 때 그 어둠의 어느 한 쪽에서 빛을 찾아내는 지혜가 더 좋다는 말이다.)

 

무리짓기의 딜레마

암튼 무리 생활의 불편한 점은 그 구성원의 어느 누구도 내맘대로’, 즉 각자 자기 맘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맘대로 못하면 기분이 안좋아진다. 생명은 누구나 내맘대로 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진다는 말인다. 어려운 말로 존재론적 자유 또는 자기결정권이라 하겠다. 그러니 무리짓는 종들은 근본적으로 딜레마를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무리에 끼는 게 실생활에서는 분명 도움이 되는데, 내맘대로 못하니 자주 속이 상한다. 그렇다고 무리를 벗어나 남 눈치 안보고 살면 속은 편한데 삶이 불편하고 힘도 더 든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도 있지만, 지옥까지는 아니더라도, 추운 벌판 한복판에 피운 모닥불은 된다. 춥다고 너무 불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고, 뜨거워서 좀 나앉으면 당연히 한기가 든다.

타인이란 그렇다. 붙으면 괴롭고 떨어지면 외롭다. 적당한 거리 유지하기가 참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벌판에는 늘 바람이 불어, 불길이 잠시도 쉬지 않고 휘날리기 때문이다. 어제는 여기가 따뜻했는데, 오늘은 영 아니다. 그게 현실이다. 혹자는 이를 인생무상이라 했다. 어느 TV드라마 대사가 생각난다. 사람을 믿어서 사람하고 사는 게 아니라, 그래도 기댈 곳은 사람 밖에 없어서 그런다고. (그러니 배신 또한 원래 그려러니 하는 게 좋다.) 이게 인생 딜레마이고, 이걸 직시하는 게 살기에 편하다. 그걸 지혜라 한다.

이게 지혜라면 또 다른 지혜도 가능하다. , 붙으면 괴롭고 떨어지면 외롭다 했지만, 이걸 얼마든지 뒤집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붙으면 든든하고 떨어지면 한적하다라는 삶의 태도도 가져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긍정적 태도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 사는 게 참 좋다라는 맘이 들게 한다.

 

쌓이는 스트레스

무리 동물의 딜레마는 특히 인간종에게 더 리얼하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생존과 번식을 전적으로 본능이 시키는대로 한다. 본능은 경험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 아프리카 초원의 얼룩말은 사자랑 가까이 산다. 간혹 배고픈 사자에게 쫓겨 죽어라 도망가기도 하지만, 사자가 공격을 포기하면 다시 그 옆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는다. 본능이 그렇게 시킨다. 하지만 의식이 고도로 발달한 인간종이라면 이런 행동은 어림도 없다. 사자에게 한 번 쫓긴 사람은 다시는 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놀란 가슴 달래기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울 수도 있다. 불면의 밤이 너무 깊어 정신건강과라는 병원을 가서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사자 없는 세상을 만들까 또 불면의 밤을 고민할 수도 있다. 친구들을 모아 성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까. 아예 무기를 들고 사자를 역사냥할까. 저번에 친구를 잡아 먹은 그 사자에게 어떻게 복수할까. 겁도 나고 화도 나고 매일 정신은 사납고 맘은 불편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본능도 있지만 자유의지도 있다. 그 의지가 꺾이면 속이 상한다. 그래서 사는 게 자주 불만이다.

생물종들은 중추신경계가 발달할수록 의식이 고도화되어 이런 딜레마는 깊어진다. 지렁이보다는 참새가 더 스트레스를 잘 받고, 참새보다는 개가 더 잘 받고 등등 쭉쭉 나아가면, 그 끝판왕에는 아마 사람이 있지 싶다. 사람은 지렁이에 비해 순간순간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지 싶다.(하기야 필자가 지렁이 속을 알 수 없으니, 그냥 추정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의식의 고도화가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과 번식의 장엄한 성공을 가져왔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니 곧 빛이 있는 셈이다. 달리기도 느리고 발톱이나 이빨도 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끝끝내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생각이 많아서다. 너무 생각이 많다보니 쓸데없는 잡생각도 자동 많아지고 우리는 그걸 스트레스라 한다. 생각은 호모 사피엔스를 살린 빛이자 동시에 그를 괴롭히는 어둠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지배와 피지배

이처럼 생각많은생물종이 무리를 지어 산다. 스트레스는 배가 된다. 무리지어 분업과 협동으로 살아가니, 에너지 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여 생존에는 크게 보탬이 된다. 든든하기도 하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업적은 다 협동의 결과물이다. 나약한 인간이 혼자서는 뭘 제대로 하겠는가. 하지만 인간은 무리의 일원이기만 한 건 아니다. 무리 속에서도 끊임없이 경쟁한다. 내맘대로 하고 싶어서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또는 성질대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만족스럽다. 인간은 무리의 한 분자이면서 동시에 독립적 개체다. 독립적 개체는 자기 이익을 위해 애쓸 뿐이다. 경쟁은 갈등이고 충돌이고 투쟁이다. 스트레스다. 평화와 질서가 무너진 무리는 지옥이다.

400여 년 전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는 이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했다. 이를 그냥 두면 세상이 무너진다. 모든 개체가 각자의 생존 권리와 자유를 조금씩 때내어 만인이 무서워 할 리바이어던이라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에게 만인을 통제할 권한을 주어 개체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 리바이어던이 곧 국가다. 국가는 만인의 공영과 질서를 위해 독점적 폭력으로 구성원을 강제할 권한을 부여받은 조직체다. 국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홉스의 국가론에 전제되는 형이상학적 가설이다. 홉스는 이처럼 국가 이전의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프랑스의 루소 같은 이는 오히려 국가 이전의 자연상태가 더 좋은 세상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어느 쪽이 더 좋을까

암튼 그래서 국가라는 게 생겼단다. 꽤 설득력이 있다. 이에 설득된 자들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지지한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정치적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배를 반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개체의 독립성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지배나 피지배 자체를 아주 싫어한다. 이들은 각 개체들의 자발적 연대와 협동을 강력히 믿는다. 그들에게는 그게 작동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세상은 이들을 정치적 자유주의자라 부른다.

이렇듯 지배와 피지배는 무리동물인 호모 사피엔스의 숙명이다. 같은 무리동물이라도 사슴이나 늑대같은 생물종들은 지배 피지배가 아니라, 리더와 복종 프레임을 만들었다. 목숨 건 투쟁으로 대장을 뽑고 나면 다음 리더가 나타날 때까지는 본능적으로 복종한다. 그게, 개체의 생존과 집단의 번식이라는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 본능에는 반칙이 없다. 완벽한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르다. 자기의지가 있으니, 자주 반칙을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때 반칙이란 자기가 세상에 기여한 몫 이상을 가져가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는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지배 피지배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마르크스의 견해가 맞았다. 가진 자, 기득권자들은 더 가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 이를 튼튼히 한다. 그 정당성은 대개 정치적 선동으로 확보된다. 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선 더 그렇다. 피지배 대중은 이 선동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자발적으로 복종 지지하기도 한다.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은 이 저항과 복종이 시대정신으로 최적화 되는 것인데, 이게 현실적으로 참 어렵다. 어떤 이는 저항해야 할 일에 복종하고, 또 어떤 이는 복종해야 할 일에 저항한다. 자유의지의 방종 탓이며, 이는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는 인간의 근본한계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가고, 세상은 그런대로 굴러간다. 물론 도가 지나치면 망하고 사라진다. 이는 신의 섭리일까, 인간의 선한 집단의지 덕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삶을 생각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 싶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삶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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