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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편들기, 그게 정의다

함사세요(함께 사는 세상이요) 3 - ‘여성’이 항거하다

20180831일 (금) 14:56 입력 20180831일 (금) 14: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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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하나 : 기승을 부리던 폭염도 많이 누그러졌다. 저녁을 먹고는 동네 놀이터에 나갔다. 가을이 기다려지는 한가로운 밤이었다. 아이들도 신나게 뛰놀고 있었고, 저녁마실을 나온 어른들도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필자도 놀이터 한 켠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리 비켜봐. 내부터 좀 하자. 쪼그만 계집애가 뭐한다고 밤에 동네에 나와 난리니. 그것도 허연 다리 다 드러내놓고.”

 

어떤 초로의 남자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소녀에게 약간 언성을 높여 하는 말이었다. 소녀가 운동기구를 재미있게 타고 있었고, 그 초로의 남자도 그걸 타고 싶었나 보다. 그 소녀는 한순간 어이없어 하는 듯 했지만, 곧 순순히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는 화가 난 모습으로 놀이터를 떠났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갑작스레 찾아온 47, 홍대앞에서 열린 성차별성희록끝장집회참가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참여연대 홈페이지>

 

# 장면 둘 : 지난 84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벌써 네 번 째 시위였다. 이날 시위에는 45천여명(주최 쪽 추산)의 여성들은 참여해 몰래카메라가해자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공정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했다. 앞 달인 7월 서울 혜화역 앞에서 열린 3차 시위에는 전국에서 버스까지 대절해 무려 6만여 명이 모이기도 했다.

 

시위의 발단은 홍대 몰카에 대한 경찰의 편파적 수사(시위대 측 주장)” 때문. 지난 5월 홍익대학교 회화과 수업에 참여한 남성 모델의 누드 사진이 몰래 촬영돼, 커뮤니티 워마드에 게시됐다. 경찰은 같은 달 10일 이 수업에 함께 한 여성 모델 안 모씨를 용의자로 긴급체포했다.

 

경찰의 발빠른 수사에 여성계는 용의자가 여성이라서 이리도 빨리 대대적으로 공공연하게 수사를 전개했다. 여성들이 몰카 피해를 봤다고 신고했을 때, 경찰이 이리도 신속히 움직였던가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여성들은 또 불법촬영 가해자가 여성이라서 영장실질심사 당시 경찰이 포토라인을 설치했다는 항의도 표시했다.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란 제목의 국민청원에 누리꾼들이 동의가 물밀듯 했다.

 

이주민 서울경찰청장이 성별에 따른 편파수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며 통상적인 불법촬영 사건과 달리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진 범행이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에 속도가 붙었다는 해명을 했지만 이들을 설득하진 못했다.

 

813일 서울서부지법 형사 6단독 이은희 판사는 안 씨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 이수 프로그램 40시간을 명령했다. “초범인 데다 반성문을 16차례나 제출했는데도 실형 선고가 나오자 다시 여론이 들끓었다.

 

한 여성은 언론 인터뷰에서 몰카범이 실형을 받는 것은 처음 본다. 다른 몰카범은 대개 집행유예가 나오지 않았나라며 여성만 처벌하는 국가인가. 여전히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는 곳은 없다고 비판했다.

 

# 장면 셋 : 판결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보자. 짐작했겠지만, 안희정 재판이다.

 

홍대 몰카 재판 다음날인 814일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 11(조병구 부장판사)는 수행비서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 재판에서 모든 혐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성추행,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강제추행 등 3)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에는 여성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적으로 이 판결에 대한 후폭풍이 거셌다.

 

350여 개 여성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미투운동과 함께 하는 시민행동은 판결에 반발하며 18일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를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었다. 집회에는 54차대회 때보다 10배나 많은 2만여 명이 동참했고, 이들에 공감하는 남성들 대거 참여했다. 이어 '헌법앞 성평등'25일 같은 장소에서 집회를 열고 판결을 성토하고 나섰다. 이들은 '성차별적 사법·행정 절차를 규탄하기 위해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발적 모임'이라 한다.

 

1심 재판부는 이번 무죄 판결을 두고 현행법상의 한계라고 입장을 밝혔다. 시민사회에서는 법 개정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다. 그간 미투 열풍 속에서 국회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말만 무성했다. 올해 초부터 쏟아진 미투 관련 법안 132건은 아직 모두 계류 중이다. 이 가운데엔 이번 무죄판결의 핵심인 비동의간음죄를 담은 형법 개정안도 다수 포함돼 있다.

 

비동의간음죄(일명 No Means No rule)는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강간으로 간주한다는 법으로, 이미 영국, 독일, 스웨덴 등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야4당 여성의원들은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위한 국회토론회를 열고, 현행 성폭행 관련 입법의 미비점을 논의했다. 정춘숙·금태섭·표창원 의원 등 민주당 의원도 1심판결을 비판하는 개인적 입장을 밝혔지만, 정작 더불어민주당은 침묵하고 있어 수권정당으로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2123일 전국 성인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1심 판결에 대해 26%잘된 판결이라고 답했고, 45%잘못된 판결이라고 답했다. 특히 20대 여성의 65%, 30대 여성의 51%, 40대 여성의 57%잘못된 판결이라고 봤다.

 

검찰도 이번 판결이 법리 사실 심리 모두 잘못이라며 항소의 뜻을 밝혔다.

 

# 사족 : 누군가의 딸이요, 누나 언니 동생 엄마인 여성들이 왜 이처럼 분노하는가. 이들은 특정인의 특정사안에 대해서만 항의하는 건 아닐 것이다. 여성을 대하는 우리사회의 태도 전반에 대한 항의일 것이다. 남성들의 태도, 국가의 태도, 심지어 여자인 엄마도 딸에게 여자가 뭐한다고...”라 말하는 의식문화의 태도에 대한 항의일 것이다.

 

필자 스스로 자문해본다. 이들의 항거를 진정 공감하는가.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몰카의 공포, 밤길의 두려움, 넘을 수 없는 유리천장’, 상대적 박탈감, 기회의 불균등, 부당한 대우, 심지어 (이제는 많이 나아졌다지만) 과거 명절날 고속도로 휴게실 여성화장실 앞의 긴 줄서기 등등. 어쩌면 이 땅의 남자들이 제대로 짐작조차 못할 불편과 불평등과 불공정을 감수하고 살아온 그들이 아닐까.

 

이번 여성들의 항거는 여권선언이라기 보다는 여자사람의 인권선언이다. 사람은 성별 지위 연령 학벌 등 모든 인위적인 요소를 넘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자유와, 이유없이 부당한 대접을 받지 아니할 평등을 원천적으로 추구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세대들은 학교에서 그리 배웠고, 사회의 약속인 헌법을 봐도 그렇고, 실제 사회도 그리 작동한다고 믿었으리라.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남성이, 국가가, 법과 제도와, 우리 사회의 만연된 공고한 권위의식이 그들을 숨막히게 했던 것이리라.

 

이제 그들은 항거한다. 어쩌면 이제 항거가 시작된 것이리라. 그 끝은 누구도 모른다. 그들과 소통하며, 그들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그 항거는 함께 살자는 호소다. 그 호소를 경청해야 한다. 경청은 이해요, 이해는 공감이며, 공감은 편들기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들은 사회적 약자다. 열등한 국민이 아니다. 약자 편들기, 그게 정의다.

 

전인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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