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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20201105일 (목) 12:1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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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현대는 과학의 시대다. 과학적 진리만이 유일한 진리라 일컬어진다. 과학은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고, 그 길만이 인류가 지향해야 하는 길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철석같은 믿음이다. 현대인치고 그 누가 과학적 진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겠는가.
과학은, 정확히는 서양 근대과학을 출발로 하는 현대과학은 인간사 많은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또 앞으로 남은 과제들도 마찬가지로 해결할 것이다.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또는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그리 생각하고 믿는다.
사실이다.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인 먹거리 문제만 해도, 과학은 놀랄만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아직 지구상에는 기아로 사망하는 이들이 많이 있지만, 이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요, 나중에는 이 문제마저 과학이 해결해 줄 것이다. 
생활의 편의 문제도 그렇다. 냉장고, 에어컨, 공기정화기, 식기세척기 등등 종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전들이 의식주의 불편과 수고를 덜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 네비게이션, 스마트폰들도 인간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우주 저멀리 탐사선을 보내는가 하면, 의학은 유전자를 넘어 분자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곧 암도 정복한다고까지 전망된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상상이나 했겠는가.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은 또 어떤 과학결과물들을 이용하고 있을지 우리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과학의 시대, 빛과 그림자
물론 과학이 낳은 부작용도 만만찮다. 환경오염, 생태계파괴, 유전자변형, 자원고갈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과학은 이 또한 과학의 힘으로 해결가능하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은, 정확히는 과학주의는 돈과 더불어 현대인의 종교다. 비과학적이란 말은 미신이자 거짓이고 결국 사람을 혹세무민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어떤 주장이 진리라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증명되지 못하는 주장은 곧바로 용도폐기된다. 웃음거리 밖에 안된다. “말도 안된다”는 말은 곧 비과학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종교도 이 부분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종교란 인지가 깨이기 전 사람들이 고안해낸 미신이거나 잘못된 세계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종교는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그 전근대적 정체가 모두 밝혀져 소멸에 이를 것이고, 또 소멸돼야 마땅하다고까지 주장한다. 특히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사회학 영역에서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이런 생각들이 강하고, 또 대중적으로도 상당히 먹혀들고 있다. 사실 이런 지적들은 절대적 인격신을 강조하는 서양기독교를 위시한 유신론 종교에 적용되는데, 상대적으로 이런 지적들로부터 자유로운 불교도 타력신앙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런 지적을 비켜가기 어렵다.

과학과 종교라는 두 영역
하지만 타력신앙이 아닌 공사상을 강조하는 불교의 경우, 일각에서는 현대물리학, 그 중 양자역학의 연구결과들은 오히려 불교사상을 입증하는 결과들을 내놓기에, 불교는 과학으로도 입증되는 참진리임을 강조하는 얘기들도 많이 회자된다. 
‘동양철학과 현대물리학’ 또는 ‘반야심경과 양자역학’ 류의 제목으로 얘기되는 이같은 생각들은 상당히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불교인들로서는 매우 호감이 가고 매력적인 생각인 것은 사실이다. 굳이 그 관련성과 근접성, 유사성 등을 외면할 필요는 없지만, 필자은 여기서 확언컨대, 2,500년전 위대한 선각자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하필이면 역사도 겨우 300여년 밖에 되지 않고, 인류 사상사에서도 한 부분에 불과한 서구근대과학의 지지나 증명을 받아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다. 
역사의 길고 짧음이나 지역의 좁고 넓음을 시비하는 게 아니라, 불교와 근대과학은 그 영역이 전혀 별게란 얘기다. 생겨난 바탕이나 근원이 다르고, 작동하는 룰이 다르고, 지향하는 목표도 다르다. 물론 유사성은 인정하지만, 그건 별게의 문제다. 굳이 외국스포츠를 들먹이자면, 영국 럭비와 미국 풋볼이 많은 공통점이 있더라도 둘은 엄연히 다른 종목이다. 두 종목 선수가 함께 기본훈련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함께 시합을 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과학과 불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진짜 진리, 가짜 진리(?)
과학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이 주장하는 진리는 ‘진짜진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과학적 진리는 조건만 동일하게 맞춰주면 똑같이 재현된다. 영원불변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게 진리 아닌가. 게다가 과학적 진리에 바탕해 물건을 만들어보니, 희한하게도 딱딱 맞아떨어진다. 대포나 미사일같은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가 굴러가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방안이 시원해지며, 죽을 것같았던 고통이 알약하나로 말끔해지는데 뭘 더 말하랴. 류현진의 투구 궤도는 예측가능하고, 추신수의 타구 포물선도 측정가능하다. 이런 선수들은 돈도 많이 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하지만 과학의 진리는 반의 진리다. 과학의 결과를 부정하기도 어렵고, 그 결과물의 혜택을 입지 않고 사는 것도 어려운 세상이지만 사실 과학신봉들이 신봉하는 정도로 과학은 세상 모든 진리를 대표하지 못한다. 
진리가 뭔지 말하기는 참 어렵다. 과연 어떤 인간이 그 누구도 부정 못할 진리를 알 수 있으며, 설사 안다한들 그걸 타인에게 전할 수 있을까.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진리를 지향은 하되, 진리를 완전히 파지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삶이 그만큼 복잡미묘하기 때문이다. 그건 신비다. 그래서 인간은 사실의 영역에서 살지만 의미의 영역에서도 산다. 과학의 진리는 사실의 진리요, 종교의 진리는 의미의 진리다. 과거 인간 의식이 덜 분화되었을 때는 종교가 과학의 영역까지 도맡았다. 인간의 인지가 점점 깨면서 이제 사실의 영역을 감당하는 분야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기 기세가 자못 우람하다. 그러다보니 의미의 영역까지 넘보는데, 과거 임시적으로 맡고 있던 사실의 영역을 종교가 아직까지 고수하려는 게 시대착오적이라면, 사실 영역에서 위세를 떨친다고 과학이 종교영역까지 넘보는 것 또한 교만이다. 

사실과 의미
이런 양자의 착오가 벌어지는 데는 사실영역과 의미영역이 칼로 자르듯 딱 잘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는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다. 어쩌면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 하나지만 둘이고, 둘이라 하기에는 하나다. 그러나보니 서로의 영역을 과잉침범하기도 한다. 불교와 현대사상을 엮어보려는 시도들이 의미있으면서도 조심스러운 이유가 여기 있다. 
진리의 본질은 자유다. 하이데거라는 꽤 유명한 서양철학자도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리 말했다 하니, 통 터무니없는 생각만은 아니리라. 암튼 사실영역이든 의미영역이든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게 진리뿐일까마는 최소한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건 진리가 아니리라. 과학도 우리를 물심으로 자유케 하기에 그 진리됨을 인정하는 것이고, 종교도 영육간에 우리를 자유케 하기에 그 진리됨을 우리가 수용하는 게 아니겠는가. 다시 강조하건데 인간의 그 어떤 생각도 인간을 구속하는 건 진리가 아니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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