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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마당>

20201222일 (화) 15:21 입력 20201222일 (화) 15: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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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를 주었다. 나루터에 와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지므로 형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다. 아우가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사랑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형도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고려 말에 개성 유수를 지냈던 이억년이 벼슬을 버리고 경남 함양군으로 낙향할 때 동생 이조년이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해 주다가 생긴 일이었다.
이억년의 동생 이조년이 지은 시조가 바로 <이화에 월백하고>이다.

 
[현대어 풀이]

하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자정을 알리는 때에
배나무 가지에 깃든 봄날의 정서를 소쩍새가 알고 우는 것이랴마는,
정이 많은 것도 병인 듯이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이 시는 봄밤에 느끼는 애상적 정서를 시각적인 심상과 청각적인 심상을 활용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얀 배꽃과 환히 비치는 달빛, 은하수를 통해 고독과 애상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소쩍새의 울음을 통해 화자가 느끼는 한의 정서를 청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초장과 중장에서는 밝은 달 아래 배꽃이 하얗게 피어 있고 어디선가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봄밤의 분위기를 제시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특히 봄날 밤에 배꽃이 피어 있는 나뭇가지에 어려 있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달빛, 은하수, 소쩍새 등의 자연 현상과 연결시켜 절묘하게 노래한 점이 돋보인다. 종장에서는 봄밤의 애상과 우수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자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계간지 《나래시조》가 2006년에 현대 시조시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고시조를 설문조사한 결과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이 1위에 뽑혔다. 황진이의 ‘어져 내일이야’(6위), ‘청산리 벽계수야’(8위)도 10위 안에 들었다. 이어 홍랑의 ‘묏버들 골라 꺾어’(2위),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3위), 계랑의 ‘이화우 흩날릴 제’(4위), 정몽주의 ‘이 몸이 죽고 죽어’(5위) 등이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화에 월백하고>의 지은이 이조년은 5형제 중 막내였는데, 형제들의 이름은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이었다.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으로 시작된다. 그 시에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이라는 구절이 있다. 시인은 수줍고 두근거리는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설렘과 기쁨을 마음에 꽃이 피어나는 것으로 표현했다.
황지우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사랑의 불씨가 막 타오르는 심정을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라고 노래했다.
약속 장소에 미리 와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은 조마조마하고 손에는 자꾸만 땀이 밴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마다 온통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너의 몸짓이 되어 다가온다.
그렇게 피어나는 사랑처럼 마냥 떨리는 일이 있을까.

 
허준이 자기도 모르게 밭은기침을 했다. 처녀는 내외를 하는지 몸을 곁으로 세워 비켜섰다.
앞서 지나가란 뜻이었다.
허준은 지금까지 밟아오던 처녀의 발자국을 벗어나 성큼성큼 다가갔다.
외면해 선 처녀의 태깔이 어딘지 모르게 고와 보였다.
곁을 지나며 허준이 흘긋 처녀를 돌아보았다.
장옷을 여미어 쥔 위로 눈길을 내리깐 처녀의 음전한 모습과 희고 반듯한 이마가 보였다.
지나쳐가는 허준의 가슴이 문득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십여 보 지나자 허준은 자기도 몰래 돌아보았다.
- 이은성, 《소설 동의보감》에서

 
천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설움과 한을 술로 다스리다가 늦은 밤에 귀가하던 허준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다. 지름길 삼아 접어든 절의 경내를 벗어나자 이 세상 자기 혼자 새 길을 열며 가고 있다는 허준의 오만한 착각을 비웃듯 한 사람의 발자국이 나타나 있었다. 좀 더 빠른 걸음으로 발자국을 쫒기 시작했다.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여자의 작은 발자국을 따라 치마가 쓸고 간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달음질로 따라붙은 다음에 허준은 자기도 모르게 인기척을 내며 처녀를 지나친다. 그 순간 허준의 마음에 달이 환하게 떠오른 것이다.
사랑은 자기도 모르게 피어나기 때문에 짜릿하면서도 알싸하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가슴 아리는 일도,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허준은 처녀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숱한 나날들을 애태우고 조바심치며 기다릴 터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과 떨림의 파장만큼 꽃이 더욱 눈부시게 피어나지 않을까.


누구나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기를 바라지만 때때로 머뭇거려야 하는 사랑이 있다. 영화 <클래식>에서 지혜(손예진)는 친구와 맺어진 상민(조인성)에게 끌리지만 차마 그에게 다가가지는 못한다.
지혜의 친구 수경은 연극반원인 상민을 좋아한다. 상민의 아이디를 알아낸 수경은 지혜에게 메일을 대필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지혜는 거의 두 달 동안 수경이 대신 상민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쓰기 위해 매일 상민을 지켜보던 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연극반 공연이 끝나는 날,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객석에서 수경은 상민에게 꽃다발을 주며 오빠한테 하루도 빠짐없이 메일을 보냈다고 말한다. 이에 상민이 반색하며 “그게 바로 너였어?”라고 묻는다. 지혜는 아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그 후 수경은 상민과 더 가까이 있기 위해서 연극반원이 되었다.
배경이 만들어지지 않은 무대에서 학생들과 여주인공인 수경이 연습을 하고 있고, 상민이 배우들의 위치를 지정해 주며 연출을 하고 있다.

지혜 : (내레이션) 그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힌다. 하지만 그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평소에 상민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혜는 교내 극장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와 텅 빈 객석의 중간쯤 자리를 잡는다.

지혜 : (내레이션) 수경인 그와 만날 때마다 나를 불러내서 자기의 남자임을 과시한다. 오늘도… 난 그를 볼 수 있다. 그를 만날 수 있다.

상민은 객석 쪽에서 무대를 바라보며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다가 지혜의 옆자리에 앉는다. 지혜는 긴장하고 있다.

지혜 : (내레이션)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옆에 앉아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연기자들이 대사를 읊고 있다. 지혜에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무대만 바라보고 있는 상민. 지혜, 곁눈질로 상민을 바라본다.
지혜는 “돌아봐라! 돌아봐라! 돌아봐라! 얏!” 하고 주문을 외운다. 상민이 무심코 지혜 쪽을 보자 지혜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가 얼굴이 빨개지며 모른 척 외면한다. 앞만 보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지혜의 가슴이 콩당콩당 뛴다.
지혜가 비를 피하기 위해 교내의 넝쿨나무 아래 마련된 돌 벤치에 앉아 있다. 비를 보고 있던 지혜의 눈에 상민이 멀리서 비를 피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가까운 건물의 처마 밑에 다다른 상민은 잠시 멈췄다가 지혜 쪽으로 달려온다. 지혜는 또다시 가슴이 덜컹거린다. 지혜가 도서관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상민은 저고리를 벗어 우산처럼 가려준다. 상민의 손이 어깨에 닿자 지혜는 감전된 듯 어쩔 줄 몰라 한다. 상민과 지혜는 어깨를 맞대고 도서관까지 뛰어간다.
지혜는 이틀 뒤 비가 내릴 때 매점에 들렀다가 지난번에 상민이 점원에게 우산을 주고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혜가 창밖을 보자 그저께 비를 피해 벤치로 달려가던 그 장소가 훤히 보인다. 그때의 지혜처럼 누군가가 비를 피해 달려가고 있다. 상민이 지금처럼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지혜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 곽재용, <클래식>에서(재구성)

 
그 순간 상민의 사랑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빗속을 달려가는 지혜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의 마음마저 달뜨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은 사랑의 황홀함을 가슴이 터질 듯한 절정에 이르도록 이끌어준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 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

나에게 넌 초록의 슬픈 노래로
내 작은 가슴속에 이렇게 남아
반짝이던 너의 예쁜 눈망울에
수많은 별이 되어
영원토록 빛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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