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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든 영혼의 단짝, 윤동주와 송몽규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의 <이야기마당>

20210423일 (금) 11:06 입력 20210423일 (금) 11: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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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명동촌의 사계절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 진달래, 살구꽃, 앵두꽃, 함박꽃, 나리꽃이 시새워 피고, 앞 강가 우거진 숲에는 버들강아지가 활짝 피어 마을은 꽃과 향기 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었다. 여름에는 전원이 싱싱한 푸름 속에 묻혀 있고, 가을엔 산과 들이 단풍으로 물들고 논밭은 황금빛으로 무르익어 황홀하였다.
겨울의 경치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이 찬바람에 울부짖고, 눈에 덮여 은빛으로 반짝이는 들판의 풍경은 참으로 절경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날엔 노루 떼, 멧돼지 떼 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오고, 그런 날이면 온 마을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들뜨곤 했다. 윤동주 시에 담겨 있는 서정성과 순수한 내면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명동 마을에서 보낸 유년기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문학소년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

1925년 4월 4일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눈에 금방 눈물이 핑 도는 아이였다. 반면에 같은 학년이었던 송몽규는 말 잘하고 엉뚱한 아이였다. 둘은 늘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1917년 9월 28일, 윤동주보다 세 달 앞서서 태어난 송몽규는 그의 동갑내기 고종사촌 형이었다.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송몽규도 문학 소년이었다. 4학년 때 윤동주는 《아이생활》이란 잡지를, 송몽규는 《어린이》란 잡지를 서울에서 부쳐다 읽었다. 동네 아이들은 그들이 다 읽은 다음에 빌려서 읽었다. 두 소년이 서울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를 구독한다는 것은 그 당시 만주의 벽촌에서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윤동주는 1931년 봄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였고, 윤동주네 집은 그해 늦가을에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용정에는 일본 경찰이나 중국 관원이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는 치외법권 지대가 있었다. 그곳은 캐나다 선교부가 자리 잡은 용정 동남쪽의 높은 지대로, 흔히 ‘영국덕’이라고 불렀다. 캐나다가 영국 연방국 중 하나였기 때문에 ‘영국인들의 언덕’이란 뜻으로 만들어진 별칭이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병원 등이 있던 영국덕에서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었다.
1932년 4월, 윤동주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만 평 부지에 600평의 본관과 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 있는 은진중학교는 용정 최고의 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재봉틀로 기성복을 맵시 있게 고치거나 직접 나팔바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2학년 때에는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을 했는데 상으로 탄 예수 사진 액자를 늘 집에 걸어 놓았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는데 특히 기하학을 좋아하였다.
1935년 9월 1일, 은진중학교에서 4학년 1학기까지 마친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매년 3월 1일이 되면 모두 교실의 자기 책상 위에 머리를 수그리고 온종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침묵시위를 벌였다. 일본인 교사들은 물론 한국인 교사들도 이 숙연한 광경에 압도되어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냥 나가곤 했다. 
1936년 1월 20일, 숭실중학교 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윤산온(Gorge McCune)은 일제의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하여 파면당했다. 1936년 4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들어 교장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 경찰들이 교문 안으로 들어오자 학생들이 달려들었고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일로 숭실중학교는 무기휴교가 되었고, 윤동주는 신사참배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하였다.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중학교에 편입했다. 그 무렵, 송몽규는 독립운동을 하러 갔던 중국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5개월쯤 갇혀 있다가 석방된 송몽규는 용정 대성중학교에 편입했다. 1938년 4월 9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 문과에 나란히 입학한다.

자유로웠던 연희전문 시절

만 27년 2개월의 생애에서 연희전문 문과 시절은 윤동주에게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연희전문은 기독교계 학교였기 때문에 윤동주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과 분위기 속에서 지낼 수 있었다. 입학 동기생인 유영은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우리 겨레의 학문과 정신을 지도하는 교수들이 있었고, 학생들 또한 그러한 자세와 정신을 가지고 찾아왔지요. 그러니까 동주는 꿈에 그리던 학원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온 거예요.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함께 왔지요. 그 둘은 혈연관계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해서 마치 쌍둥이 같았어요. 같은 환경에서 같은 학교에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학창 생활도 같은 길을 걸었지요. 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반대였어요. 동주는 얌전하고 말이 적고 행동도 적은데, 몽규는 말이 거칠고 행동반경이 큰 사람이었죠. 그 둘은 시 공부와 창작도 같이 했어요. 그들의 다른 성격은 시에서도 나타나 좋은 대조를 이루었지요. 성격이 다르면 다툼이 일어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둘이 다투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말하자면 동주는 외유내강형이라고 할까요? 사람이 그렇게 유순하고 다정할 수 없었어요. 반면에 그 지조나 의지는 감히 누구도 어찌 못할 정도로 굳고 강했죠.”
당시에 윤동주가 공부하던 문과대 석조건물은 지금도 연세대 문과대 건물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그가 살았던 기숙사 건물 역시 그대로 남아 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간 윤동주는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세 명이 한방을 썼다. 윤동주는 2학년 때에는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에서 하숙했다. 그때 북아현동에 살고 있던 시인 정지용의 집을 방문해서 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일이 있었다. 윤동주는 중학교 때부터 정지용 시집을 늘 끼고 다닐 정도로 그의 시를 좋아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둘 다 일본 유학을 정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일본으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서류를 뗄 수 없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가서 창씨개명계를 제출했다. 졸업증명서 등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29일에 성씨를 ‘히라누마’로 바꾸었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동주’가 아닌 ‘도오쥬우’가 되었다. 1942년 2월 12일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한 송몽규는 일본식 이름이 ‘소무라 무게이’가 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왜 욕됨을 감내하면서까지 일본 유학을 감행했을까? 그 이유나 동기는 무엇인가. 그로부터 꼭 1년 6개월 후에 일본에서 경찰에 체포된 그들은 유학 동기를 진술해야 했다. 그때 한 답변은 “조선독립을 위해서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면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 연구로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죽음으로 이어진 일본 유학 

일본에 건너간 윤동주와 송몽규는 교토에 있는 교토제국대학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송몽규는 시험에 합격하여 1942년 4월 1일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윤동주는 시험에 불합격하여 다시 입학시험을 치르고 도쿄의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42년 7월, 릿쿄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은 윤동주는 북간도 용정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동생들에게 “앞으로 우리말 인쇄물이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라고 당부했다. 이 당부는 결국 그가 동생들에게 남긴 유언인 셈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윤동주는 1942년 10월 1일자로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위험을 느끼고 귀국을 결심한다.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짐을 소포로 부친 후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특고(사상 탄압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 경찰의 특수조직)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송몽규는 7월 10일에 체포되어 이미 경찰서에 갇혀 있었다. 일제의 특고에서는 ‘요시찰인’인 송몽규를 늘 감시하고 있었다. 특고 형사들은 송몽규를 미행하여 ‘우리 민족의 장래’니 ‘독립운동’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계속 엿들어 오다가 두 사람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연행한 것이다. 
윤동주의 체포 이유는 조선독립을 실현하려고 송몽규와 함께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유발하는 데 전념했다는 것과 조선인 징병제도를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형무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고향 집으로 엽서를 보냈다. 그의 아우 윤일주가 ‘붓끝을 따라 운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엽서를 써서 보냈더니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도 울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답장을 보내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늦어도 매달 5일까지는 반드시 오던 엽서가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노래했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절명했다. 윤동주가 옥사했다는 전보를 받은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은 시신을 찾으러 후쿠오카 형무소로 떠났다. 윤동주가 죽은 지 10일 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먼저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때 송몽규는 반쯤 깨진 안경을 눈에 걸친 모습이었고, 살가죽과 뼈가 붙을 정도로 몹시 말라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윤영춘이 “왜 그 모양이냐?”라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며 말소리가 흐려졌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윤영석과 윤영춘은 복도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송몽규는 1945년 3월 7일에 결국 절명했다.
“가슴속에 새겨지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역사를 만든 영혼의 단짝, 윤동주와 송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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