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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220422일 (금) 14:5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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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집도 땅도 없는 구두 수선공 시몬이 어느 농가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는데, 구두를 만들거나 수선해서 버는 돈이 수입의 전부였다. 그러나 빵값은 터무니없이 비쌌고, 구두 수선비는 지나치게 쌌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옛날 황제(짜르)가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 시대를 살던 시몬이라는 한 가난한 구두 수선공 이야기로 시작된다. 시몬은 그 혹독한 러시아의 한 겨울을 달랑 코트 하나로 버텨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것도 아내와 번갈아 입어가며 말이다. 그래도 이번 겨울에는 한 줄기 쬐그만 희망이 있다. 밀린 외상값을 받기만 하면 양가죽을 사서 새 외투를 만들어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혹한 삶은 이번에도 시몬을 배반한다. 빚쟁이는 먹고 죽을래도 돈이 없다 했다. 속상한 시몬은 그나마 몇 푼 있던 돈으로 술을 퍼마셔 버렸다.

얼큰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시몬은 동네 어귀 교회 모퉁이에서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떠는 미하일이라는 청년을 만난다. 그는 사실 신의 명령을 어겨 세상으로 쫓겨온 천사다. 삶의 근본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의 정답을 찾아야 다시 하늘로 올라올 수 있다.

 

삶에 대한 세 질문

시몬이 미하일을 처음 봤을 때는 모른 척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 가 다시 돌아왔다.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게다. 시몬은 떨고 있는 미하일에게 자신의 코트를 벗어 입히고는 집으로 데려 간다. 시몬의 아내 마트료나는 발끈한다. 새 코트를 만들 양가죽은커녕 술에 취한 남편이 왠 낯선 거지 하나를 데리고 오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시몬은 이런 아내를 설득한다. 우리가 믿는 신을 생각하면 차마 거지를 내칠 수 없었노라며. 아내도 결국 화를 삭이고 미하일에게 따뜻한 스프를 내준다. 미하일은 미소를 짓는다. 신의 첫 질문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사랑이었다.

시몬 부부는 오갈데 없는 미하일을 당분간 거두기로 한다. 구두 수선 일을 가르쳤다. 미하일을 손끝은 매우 날렵했다. 날이 갈수록 기술을 늘어갔고, 나중에는 시몬을 넘어 선다. 소문이 나자 주문도 밀렸다. 시몬은 미하일이 오래오래 같이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건장한 신사가 찾아와 독일산 최고급 가죽을 내놓으며, 1년 동안 신어도 헤지지 않을 튼튼한 장화를 주문했다.

시몬은 이 일을 미하일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미하일은 장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슬리퍼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천사 미하일은 이미 알았다. 신사에게 필요한 건 오래 신을 장화가 아니라, 망자용(亡者用) 슬리퍼라는 걸. 즉 그 신사에게는 이 땅에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나 다를까. 신사는 구둣방을 나가며 낮은 구둣방 문에 머리를 부딪힌다.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신사는 급사하고 만다. 유족들은 맡긴 장화가죽으로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울먹였다. 미하일은 이미 만들어 놓은 슬리퍼를 내준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었다.

세월은 흘러 6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부인이 구둣방을 찾는다. 쌍둥이 아이들 신발을 주문했다. 이런저런 말 끝에 미하일은 이 부인의 사연을 듣고는 소스라친다. 신의 세 번째 질문의 답을 찾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난제

그럼 애당초 천사 미하일은 신의 어떤 명령을 어겼던 것일까. 당시, 미하일은 천명을 다한 한 여자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여자는 막 쌍둥이를 출산한 참이었다. “제가 없으면 이 아이들을 누가 돌보나요.” 여자의 애원에 미하일은 차마 그녀의 목숨을 거둘 수 없었다. 결국 다른 천사가 그녀의 영혼을 거두었고, 미하일은 지상으로 쫓겨난다.

한편, 미하일의 걱정과는 달리 쌍둥이 여자아기들은 이웃에 사는 착한 부인을 만난다. 아기들은 배 아파 낳은 자식들 못잖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예쁘게 자랐다. 한 아기는 생모가 사망할 당시 그 몸에 짓눌려 한쪽 다리를 절름거렸다. 이 착한 부인은 이런 아이들 발에 꼭맞는 신발을 주문하러 소문난 구둣방을 찾은 것이다. 미하일은 알았다. 세 번째 질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답은 사랑이었다. 자신 역시 시몬네 가족의 따뜻한 사랑으로 지상에서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결국 신의 질문에 대한 답들도 찾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세 가지 모두를 깨달은 미하일은 곧 다시 천사가 되어 하늘로 승천한다.

"신은 모든 사람이 홀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평화롭게 하나가 되길 원하시므로 모든 사람이 진정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착각일 뿐, 진실로 인간은 사랑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톨스토이의 깨달음

이상은 러시아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단편 우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줄거리다. 줄거리만 대강 살피다 보니 원문 전체가 풍기는 글맛을 다 놓쳤다. 길지 않은 글이니, 원문을 찾아 읽어도 좋겠다. 소설 아닌 우화라지만 대문호의 솜씨가 주는 감동이 역력하다. 암튼,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삶이 즐거운 사람도, 고단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근본 속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산다고 바빠서나, 귀찮거나, 골이 아파서거나, 그딴 거 알아 뭐하냐는 생각에 굳이 이런 자문을 외면하거나 뒤로 밀쳐 놓기도 하지만, 마음 속 저 한켠에서는 얼핏얼핏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 굳이 이런 고민을 반드시 또는 죽도록 해야한다는 건 아니다. 세상에 꼭 해야하는 건 없으니 말이다. 다만 이런 자문도 가끔 하면서 살면 좀 더 재밌고 의미있게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해 보는 말이다.

이런 견지에서 톨스토이의 이 우화를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서로 사랑하고 살아라는 얘기가 될 것인데, 이놈의 사랑이라는 게 그냥 들으면 달콤한 솜사탕 같지만, 한켠 생각해보면 참 꿈같은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특히 요즘 세태가 그렇다. 사랑이라, 좋긴 좋지만 그건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 사랑이나 좋지, 별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이웃까지 사랑한다는 게 좀 그렇다. 염량세태에 겹쳐 사랑이란 말 자체가 너무 흔해빠지다 보니 사랑한다는 말이 왠지 식상하다. 게다가, 앞에선 사랑이고 뒤에선 배신인 게 어디 한둘인가. 아낌없이 내어주는 지고지순한 사랑은 이제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톨스토이도 그렇다. 그가 이런 우화류의 이야기를 쓰는 건 말년의 일이다.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같은 작품으로 대문호 소리를 듣던 그이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과도할 정도로 기독교 이상주의에 기울어, 문학지상주의자들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한다. 사랑 같은 높은 가치는 지나치게 이상주의로 흐르면 현실에서의 삶과는 본의 아니게 멀어진다. 도저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면 차라리 외면하는 게 속편하니 말이다.

 

팃포탯 전략

그러나 사람은 이상(理想)을 완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상을 포기하지는 아니하되, 현실과 적절한 타협을 하는 게 삶의 지혜가 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다 테레사 수녀 같이 될 수는 없지만, 테레사 수녀를 존경하고 흠모할 수는 있지 않은가. 그것마저는 차마 버리지는 못하는 게, 또 버려서는 안되는 게 인간됨이지 싶다.

세상에는 천사파도 있고, 막가파도 있다. 천사들만 산다면 서로 먼저 이웃사랑을 할 것 같은데, 이놈의 막가파가 문제다. 뭘 모르고 막가파에게 먼저 선의를 베풀다가 나만 다친다. 그래서 전략이 필요하다. 생존전략을 이야기하는 게임이론은 세상 가장 좋은(?) 전략으로 팃 포 탯(tit for tat)전략을 제시한다. 실험으로도 검증된 전략이다. ‘팃포탯'상대가 가볍게 치면 나도 가볍게 친다'는 뜻이니, 팃포탯 전략은 상대가 나에게 하는 대로 갚는 맞대응 전략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상대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처음에는 일단 협력하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의 태도를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내가 먼저 협조적으로 하고, 이에 상대도 협력하면 나도 계속 협력하고, 상대가 배반하면 그 즉시 나도 협조를 거둔다.(물론 그러다가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나도 똑같이 협력한다.) 처음부터 못되게 굴 것은 없지만 일단 나쁜 놈이라 여겨지면 더 이상 선의를 베풀지 말라는 말이다. 천성이 천사표라서 나쁜 놈에게도 계속 잘해준다면 그놈이 마음을 고쳐먹는 경우보다는 나를 계속 이용하려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다. 선악이 공존하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인간세상을 지혜롭게 건너가는 전략 같다. 그게 옳다기보다는 유리하다는 이야기다.

암튼 팃포탯이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전략이라면 먼저 사랑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신이나 부모 정도 돼야 가능할까. 그러니 신도 죽고 부모 애정도 옛날같지 않은 세태에서 사랑은 난망이 아니겠는가. 헌신이나 희생 같은 숭고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조그만 배려나 친절도 어려울까. 아니면 공감만이라도.

세상에는 제 배가 고파도 밥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고, 제 배가 부른데도 남의 밥을 빼앗아 가는 사람도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착한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 좋은 세상인데, 착한 사람들이 모여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도 맞지만, 좋은 세상이어야 착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도 맞다. 우리 사회는 어떨까. 있는 놈이 더 할까, 없는 놈도 마찬가지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리 됐을까. 이를 개선할 길은 없을까. 더 근본적으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게 맞는 말일까.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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