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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말이 많으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20221007일 (금) 13:56 입력 20221007일 (금) 13: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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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이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논란이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그이가 남자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절대 남자가 아니다, 여자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사실 이 사람 자체가 참 묘한 존재다. 그를 남자라 여기고 보면 영락없는 남자고, 반대로 여자라 여기고 보면 영락없는 여자다. 사람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 진짜로 그 사람은 그렇다. 만약 이런 사람이 실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이는 누구인가. 진짜 그런 사람이 있을까.

물론 사람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다. (양성구유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자연에는 그런 존재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본모습이 원래 그렇다. 도저히 동시에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같이 있는 게 자연의 본모습이다. 우리에게 자연은 조건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인다.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실제로 공존하는 게 자연의 참모습이다. 양자역학 이야기다.

양자역학은 원자 이하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발견한 물리이론이다. 원자 이하 세계, 즉 아주 아주 작은 세계는 뉴턴의 고전역학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탐구 끝에 이 세계를 설명하는 새로운 역학, 즉 양자역학을 수립한다(양자역학은 아직 미완이다).

연구를 하다 보니, 미시세계에는 우리의 상식이나 직관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다. 인간의 현실적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말이다. 여러 이상함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이상한 건 자연이 보여주는 상보성(相補性)’이다. ‘어떤 물리계의 한 측면에 관한 지식은 그 물리계의 다른 측면에 관한 지식을 배제한다.’는 원리인데, 쉽게 말해 모순된 것이 공존한다는 이야기다. 이 이상한 이야기는 빛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모순의 공존이 자연 본모습

뉴턴역학에 이어 19세기 맥스웰에 의해 전자기학이 정립되자 물리학은 이제 자연의 비밀을 거의 다 밝혀냈다고 자부했다. 맥스웰에 따르면 빛은 전자기파, 즉 파동이었다. 그런데 웬걸. 빛을 입자라 볼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속속 나타났다.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막스 플랑크의 흑체복사이론. 흑채복사란 온도를 가진 모든 물체는 빛을 낸다는 말이다(적외선처럼 육안으로 감지 못하는 빛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빛의 에너지를 측정해 보니, 특정값의 정수배로만 나타났다. 빛이 파동이라면 연속적인 수치가 나와야 하는데, 이처럼 불연속적인 값이 나온다니, 그럼 빛이 입자라는 말인가.

둘째,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온다. 그런데 쬐어준 빛과 튀어나온 전자의 에너지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흑체복사 때와 같이 빛의 에너지가 띄엄띄엄하다는 가정을 해야 했다. 역시 빛이 입자라는 말이다. 마지막, 아서 콤프턴의 콤프턴 효과. 빛을 서로 충돌시켰더니 당구공처럼, 즉 입자로 행동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빛의 입자성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파동임이 분명한 빛이 입자의 성질도 갖는단다. 여기서 이중성이란 말이 생겨난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불가지만 실제가 그렇단다. 어쩌겠는가. 받아들여야지.

 

입자와 파동의 상보성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가. 파동인 줄 알았던 게 입자성을 지닌다면, 반대로 입자가 분명한 게 파동성을 지닌 것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가 그랬다. 20세기 초 물리학자들은 원자 연구에 매진했다. 물질의 궁극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원자를 그 궁극 단위로 생각해 왔는데, 실험 결과 원자에서 뭔가 검출됐다. 원자도 쪼개진 것이다. 검출된 건 전자였다.

원자의 내부 구조에 대한 연구가 박차를 가한다. 이에 대한 닐스 보어의 설명이 많은 관찰 결과를 잘 설명했지만, 이 설명도 좀 이상했다. 전자가 입자 아닌 파동이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드브로이가 거들었다. 그는 종래 파동인 줄 알았던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듯이, 입자 또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입자는 자신의 운동량에 반비례하는 파장을 가지는, 일종의 물질파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 하는 물체들은 분명 파동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이들의 운동량이 너무 큰 탓에 상대적으로 물질파로서의 파장이 엄청 짧아 육안으로는 파동성을 조금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들이 파동성을 띠지 않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원자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물질파 파장이 상당히 유의미한 경우가 많아 입자인 전자조차도 파동적인 성질을 보인다는 것이다.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의 경우 전자가 빛처럼 간섭현상을 일으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전자뿐만 아니라 양성자나 중성자 같이 모든 기본입자들은 이중성을 갖는다. 즉 파동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사실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원자도 입자 파동 이중성을 갖는다. 이중성은 자연의 본질인 것 같다. 보어는 이중성의 이런 특성을 상보성이라 고쳐 불렀다.

 

진실과 명료함도 상보적

이처럼 파동 개념과 입자 개념은 상보적이다. 사실 자연의 모든 대립물은 상보적이라 한다. 물리적으로 잘 정의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상보성의 대립물 가운데 물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위치와 운동량이다. 원자같이 작은 세계에서는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하나의 결과가 다른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자의 위치가 확정된 상태에는 운동량이 완전히 결정되지 않고 반대로 운동량이 확정된 상태에서는 위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지식은 다른 지식을 배제한다.) 이를 불확정성 원리라 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거가 발견한 양자역학의 핵심원리다.

어떤 물리학자는 블랙홀에도 상보성의 원리를 적용한다. 소위 사건의 지평선이쪽 저쪽이 물리적으로 절대 단절이라, 그 누구라도 지평선의 이쪽 저쪽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한다. 사실 미시세계를 가장 설득력 있게 해석한 코펜하겐 해석의 주역 보어는 상보성의 원리를 물리세계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현상이나 철학적 개념에도 적용한다. 그는 심지어 진실의 상보적 개념을 명료성이라 했다. 진실할수록 모호하다는 말이자, 선명할수록 거짓이라는 말인데, 삶의 역설(逆說)로서도 묘한 끌림이 있는 주장이다. 그러고 보니 동양사상은 이미 모순의 공존을 역설(力說)해 왔는데, 동양 현자들이 과학적 사실을 규명한 건 아니라 하더라도 양자역학과 동양사상 그 둘 사이에는 상당한 상관성 내지 유사성이 있으니, 정녕 진실과 명료성은 상보적인 걸까.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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