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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편집주간의 <다시 고전을 읽다 - 논어(1)>

“사람답게 살아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20230421일 (금) 10:40 입력 20230503일 (수) 15: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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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너무 급변하니 영문을 알 길이 없다. 혼란스럽다.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다시 중심을 잡고 질서를 갖추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이럴 땐 고전을 다시 펼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고전에는 삶의 지혜와 전략이 알토란같다. 그래서 고전이다. 다들 들어보긴 했지만 별로들 읽진 않은 책. 이제는 케케묵어 치워버려도 좋은 책. 정말 그런가.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우선 논어부터 펼쳐본다. 의식하든 아니든 우리 사회의 밑자락은 유교문화로 상당히 흥건하다. 그런 유교 메시지의 핵심은 논어에 들어 있다. 어떤 이들은 유교 또는 유학이라면 그 잔재마저 도려내야 우리가 산다고 우기고, 또 다른 이들은 그 훌륭한 가르침을 오늘에 맞게 제대로 살려야 한다고 외친다. 혐오도 맹종도 다 어지럽다. 사이 어딘가에 균형을 잡는 게 좋다. 나는 어디쯤일까. 일단 시작해 보자.

논어란 책은 공자가 죽은 뒤 그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 제자들의 기록이긴 하지만 특정 시기, 특정인이 마음먹고 딱 책으로 쓴 게 아니라, 여러 시기,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이리저리 모아 놓은 책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니 요새 책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러다 보니 공자의 사상체계나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한 학술서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공자가 한 말이나, 제자들의 물음에 답한 것들을 엮은 짧은 글모음이다.

동양 고대 사상은 대부분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사실 공자가 그 질문을 최초로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윤리도덕을 실천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생각이다. 그래서 논어는 개인의 인격수양에 관한 가르침, 사회윤리에 관한 가르침, 그리고 정치의 금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학이부터 요왈까지 모두 20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 학이편 첫 글은 이러하다. (번역문은 필자의 해석이다.)

 

(1-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참된 길을 배우고 상황에 맞춰 이를 몸에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뜻을 같이 하는 자가 멀리서부터 찾아준다면 이 또한 기꺼운 일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열불나지 않으면 그이가 진정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조끔 풀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존경하는 공자 스승님께서는 참된 삶의 길을 찾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지. 스승님의 많은 가르침 중에도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 싶고, 기억에도 선명해. 그래서 책 첫머리에 올려놨어. 한 번 잘 들어 봐.”

첫째, ‘배우고 (몸에)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제자들아,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배움에 힘써야 한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이 되는 법. 그런데 배우기만 해서는 아직 부족해. 배운 것들을 시의적절하게 삶에 적용해 습관처럼 몸에 베이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해. 그러면 삶의 올바른 길을 알게 됐다는 기쁨과 자신이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오는 생명의 뿌듯함이 크게 있을 게야. 사람은 그 힘으로 살아가는 거란다.”

둘째, ‘뜻을 같이 하는 자가 멀리서 찾아와 준다면 이 또한 기꺼운 일 아니겠는가’ = “이렇게 부단한 배움과 굳건한 실천으로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간혹 한 줄기 외로움이 스칠 때가 있어. 내가 너무 이상주의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이대로라면 정말 좋은 세상이 구현될 수 있을까. 나 혼자 백일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제자들아, 세상에는 의외로 이런 좋은 뜻을 품고 사는 이들이 많단다. 그런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어느 날 뜻을 함께 나누고자 불원천리 나를 찾아온다면, 그래서 각자가 품은 뜻이 결코 외로운 뜻이 아니란 걸 서로 나누고 확인하고 연대한다면,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만남이겠는가. 그러니 제자들아 배움과 (몸에) 익힘의 길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고, 기꺼운 길 가기를 주저하지 말거라.”

 

군자답기

셋째,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열불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 “그런데 제자들아, 이처럼 내면적 깨달음과 실천을 하고, 또 동지와 좋은 관계도 맺고 하여, 즐겁고 기꺼운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 더 남은 게 있단다. 온전한 삶을 살려는 사람은 결국 군자답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야. 군자란 스스로 올바른 삶의 주체로 우뚝 선 사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람을 말함이야. 그런데 그 우뚝 섬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스스로 우뚝 선 자는 남의 인정을 굳이 갈구하지 않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데, 뭘 더 구할까. 다만 힘써 배우고 실천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삶을 주도하며 살면 그뿐. 그게 진정 사람답게 사는 길이지. 그러니 남이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내 말을 무시해도, 심지어 거짓과 엉터리가 횡행해도 크게 울분할 것 없지. 군자는 사람의 사람됨을 믿고, 나아가 세상을 믿기 때문이지. 그런데 사람답게 산다거나, 삶을 주도하며 산다는 것은 눈앞의 내 삶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크게 멀리 보고 산다는 말이기도 해. 그러니 군자의 삶은 사람답게 사는 삶인 동시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삶이기도 해.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야. 그런 삶을 살아야 그런 세상이 되고, 그런 세상이라야 그런 삶이 가능하지. 진리와 정의의 관계가 그렇듯 말이야. 그러니 제자들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에 앞서 스스로 군자답기를 먼저 힘써거라. 그 길이 진정 잘 사는 길임을 명심하거라.”

 

행간 읽기

이상과 같은 풀이가 논어를 좀 보신 분이라면 상당히 자의적 풀이로 보일 수도 있겠다. 맞다. 하지만 무릇 모든 해석은 자의성을 지닌다. 해석자 자신의 색안경을 통해 본 해석이다. 정도의 차이 문제일 뿐이다. 모든 해석은 창조를 위한 파괴다. 파괴를 하더라도 창조의 여지가 있는 글이 고전이다. 재해석이 허용되지 못할 이야기라면 애당초 시간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공자님의 원래 본뜻이란 게 있지 않냐고. 물론 있겠지. 그러나 딱 이거다, 이것 말고는 다 엉터리다고 할 그런 본뜻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공자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다. 게다가 원칙적으로 뜻은 말로 다 펼 수 없고, 말 또한 글로 제대로 옮길 수 없기에 논어라는 글이나 필자의 이 글이나 가릴 것 없이 글은 글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다만 글의 행간에서 공자의 뜻을 함께 짐작해보자고 부탁드린다. 그래도 공자의 권위만 빌리고 뜻은 외면하는, 너무 터무니없는 해석은 문제가 분명하기에 다음 호 글에서는 사족을 좀 붙이고자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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