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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의 고전평론] 다시 고전을 읽다 - 논어 (5)

배우고 되살피고 즐겨 보살피고

20230620일 (화) 11:15 입력 20230810일 (목) 08: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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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편 1-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했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돌이켜본다. 남을 위해 (무엇을) 도모함에 불충하지는 않았는지, 벗을 사귐에 믿음직하지 못했던 건 아닌지, 가르침 받은 걸 익히지 못한 건 아닌지."

증자는 공자 말년의 어린 제자 증삼(曾參)을 그 제자들이 높여 부른 말이다. 공자보다 46세 연하다. 말년에 잠깐 가르친 것 같은데, 공자가 직접 그를 비중있게 언급한 바는 없다. 그러나 공자 사후 상당 기간 증자는 노나라 공자학단을 이끌었다. 그 학단에서 공자의 손자 자사(중용의 저자)가 배웠고, 자사의 문하에서 후일 맹자가 배출된다. 공자는 증삼을 "좀 아둔한"(선진편-17) 인간이라고 평했으나, 후일 형성된 유학 도통(道統)에서는 주류가 된다. 역사적 고증은 부족하지만 효경도 그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증자의 주요 사상은 효(孝)와 충(忠)이다. 오늘 이 구절을 이야기 할 당시만해도 증자의 ‘충’은 아직 왕이나 나라에 대한 충성까지는 확장되지 않는다. 그저 '마음 속에서 우러난 진정성' 정도에 그친다. 위인모이불충호(爲人謀而不忠乎?) 이웃 친지, 더 넓게는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진정 그들을 위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그리 하는가를 늘 돌이켜본다는 말이다. 다음 구절, '벗이나 동지에게 신실되게 했느냐'까지 보면 증자가 하루 세 번 또는 세 주제로 했다는 '반성'의 주제는 일단 충과 신(信)이다.       

그게 되레 재미
세 번째 구절, 전불습호(傳不習乎?)는 다각도로 해석 가능하다. 첫째, 내가 상대방에게 이리이리 살라고 가르친 것을 정작 나는 익히고 있는가. 말만 뻔지르르하게 한 건 아닌가. 둘째, 남에게 가르침 받은 것을 잘 익히고 있는가. 그저 흘려듣고 만 것은 아닌가. 셋째, 내가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괜한 지식자랑한 건 아닌가. 넷째, 전승받은 고전(古典)을 익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배움에 게으른 건 아닌가. 네 가지 해석이 다 일리가 있다. 어느 해석이 진짜냐고? 증자가 이 말을 했을 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 있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이런 해석 가운데 하나만 증자의 뜻에 부합하고, 나머지는 그럴듯 하긴 하지만 증자의 본뜻과는 어긋나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맞다. 하지만 삶과 삶에 관한 메시지는 수학처럼 하나로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삶이나 생각은 아날로그적인 연속체이지, 숫자 같은 디지털 분절체가 아니라서 그렇다. 쉽게 말해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이 정보를 소통하는 매개체는 이미지(그림, 형상), 숫자, 문자나 말 등이 있을 것인데, 그 각각은 다 제나름의 소통상 장단을 가진다. 그래서 어떤 정보는 그림으로 보여주면 더 좋고, 또 어떤 정보는 말로 하면 더 좋다. 물론 숫자나 문자도 마찬가지다. 

진리 일리 무리
동양사상을 기술하는 한자는 원초적으로는 상형문자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지니는 상징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상징성이 크다는 건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말이다. 그래서 같은 구절을 두고 이리도 저리도 풀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한문에도 정형화된 문법이 있고, 또 한 글자가 제시하는 의미는 전체 글의 의미맥락과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원칙만 지켜진다면 한문 고전의 해석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열려 있다. 그래서 오해나 곡해, 아전인수격 해석이 나올 우려도 있지만, 이게 오히려 한문의 매력이자 재미이기도 하다. 압축파일을 잘 풀기만 하면 그 속에 많은 의미와 재미가 있다. 사실 인간이 그렇고, 그런 인간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좋은 줄 여겼는 게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하고, 그 반대도 일어나는 게 인생이다. 인생을 어떻게 수학처럼 한마디로 꼭 찍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류 정신사에서 이것만이 진리다고 강변하는 메시지나 정보는 결국 그 허구성이 드러나지 않던가. 더 근본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능력으로 진리를 완벽히 알 수 있는가. 그 전에 '진리'란 게 있기는 한 건가. 있다 해도 상대방에게 완벽히 전달할 수 있을까. 삶에서 진리란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이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인간이 도달하면 그 순간 진리는 저만큼 멀어지는 건 아닐까. 인간은 진리보다는 무리 없는 일리를 추구하는 게 솔직한 태도 아닐까. 세상에 대한 겸손 아닐까.

진실되고 신실하고
사설이 길어졌다. 다시 돌아가자. 암튼 이런 견지에서 증자의 오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전불습호(傳不習乎?)를 두고 네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면, 기실 증자가 노린 바도 그 가능성 아닐까. 그렇다면 핵심 키워드는 역시 배움과 익힘에 있다 하겠다. 학이편 첫 구절 학이시습에서 학과 습을 말했듯, 이번 구절 전습불호에서는 전과 습을 말하는 거라는 말이다. 배우고 전하고 전달받고 하는 일도 상대와 나를 살피며 해야 하고, 그 배움을 나누고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충, 즉 진실된 마음과 믿음, 즉 신실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나의 내면과의 합치(合致)고, 신실은 상대와 관계에서 합치다. 그리고 이런 진실과 신실의 배움과 나눔은 늘 반성을 수반해야 한다는 말이 되겠다. 배움으로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나눔으로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고자 했는데, 진정 그리 잘 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지금 다루고 있는 학이편 자체가 사실 공자 학단의 학칙 같은 거다. 배움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거다. 증자의 이 이야기는 그 자세를 좀 세밀히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자주 돌아보자
여기서 잠깐. '반성'이라 해서 초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제출하던 반성문의 반성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잘못한 일만 반성하는 게 아니라, 일단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반성이 필요하다. 기획하고 의도한 대로 일을 잘 하고 있는지, 아니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는지, 대안은 어떤지 등등을 늘 돌이켜 살핌, 즉 반성(反省)해야 하는 것이다. 뉘우치라는 게 아니라, 점검해보라는 것이다. 
삶에는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황하게 된다. 방향과 방황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삶의 지난 자취를 뒤돌아보아야 가야할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가는 인생 행로에서는 그게 맞다. 귀찮아도 그렇게 해야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살펴야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살피고 보살펴야 한다. 그게 잘 사는 길이다. 그런데 배우고 익혀야 살필 수 있다. 배움은 살피는 눈을 기르는 일이다. 잘 살피는지 되돌아 봐야 보살필 수가 있다. 

즐기는 자가 최고
공자 이야기는 하다 보면 자칫 무겁기 쉽다. 사실 공자에게 그런 캐릭터만 있는 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어떤 때의 공자는 이웃집 아저씨 같기도 하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다. 다만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배움을 실천하기를 즐겼다는 데서 보통사람보다는 썩 뛰어날 뿐이다. 공자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반성 말고 즐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자. 학이편 첫 구절도 즐거움을 말하고 있고, 공자도 무엇을 하든 즐겁게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배우고 익히며, 멀리서 벗이 찾아 오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넉넉하면 좋다 헸다는 건 이미 말했고, 맹자는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즐거움,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굽어 살펴도 부끄럽지 않은 즐거움, 좋은 제자를 가르치는 즐거움을 삼락(三樂)으로 꼽는다. 노자는 쾌식 쾌변 쾌면을 말하고, 신흠은 문 닫고 맘에 드는 책을 보는 일, 문 열고 마음 맞는 손님을 맞는 일, 문 나서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일을 들었고, 다산은 어렸을 때 뛰놀던 곳을 어른이 돼 오는 것, 궁핍했을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일, 혼자 외로이 찾던 곳을 마음 맞는 벗들과 함께 오는 일 셋을 말한다. 김정희는 글을 읽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정을 나누는 것, 친구와 술 마시며 세상이야기를 논하는 것이라 했고, 전승에 공자가 만나 한 노인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 그 중 남자로 태어난 것, 95세까지 장수한 것이라는 아찔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사람마다 재미가 따로 있다는 게 참 재미있다. 배우고 반성하고 즐기는 삶이 말이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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