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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의 고전평론] 다시 고전을 읽다 - 논어(6)

왕의 남자

20230705일 (수) 09:21 입력 20230705일 (수) 09: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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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편 1-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수레 천 대를 움직이는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 하고, 나랏돈은 절약해 백성들을 복리를 도모해야 하며, 백성들을 부리려면 반드시 때에 맞게 해야 한다.”(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이번 편은 공자가 생각하는 위정자 내지 공직자의 근본 자세를 말하고 있다. 아마 공자가 젊은 시절 정치에 대한 열망이 가득 하였을 때 제자들에게 “정치 내지 공직에 임하는 자세는 이러해야 한다”고 가르친 내용일 것이다. 국민들의 신뢰 확보, 복리 증진, 민생 주력 등 지금 보면 당연한 말들이지만, 2천 5백년 전 중국 땅에서는 어쩌면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을 게다. 당시는 전제군주가 ‘엿장수 맘대로’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이다. 지지율, 균형재정, 청렴결백 따위의 원칙관념이 없었고, 실제 그런 게 펼쳐진다 해도 이는 오로지 군주의 선의에만 의존하던 시절이다. 물론 당시에도 간혹 훌륭한 인물들이 나와 선정을 베풀기도 했지만, 정리된 이념으로 지침이 선포된 건 공자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공자같은 많은 선각자들의 가르침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정치는 이래야 한다’고 알게 된 것이라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게다. 오늘날 우리가 새삼 고전의 맑은 정신을 되새겨보는 이유 중 하나도 우리가 아직 공자의 이런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왜 그럴까. 문명은 진화하지만 사람의 의식은 매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관념은 얼마든지 짜낼 수 있지만 이를 사회적 제도로 만드는 일은 지난한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는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고 말한 것일 게고.    

엿장수 맘대로
각설하고, 본문의 생소한 말들부터 설명하자. 도(道)는 도(導)다. 이끈다, 지도한다, 다스린다 등으로 풀면 된다. 천승지국(千乘之國)은 말 그대로 수레를 천 대 정도 부릴 만한 국력을 가진 나라를 말한다. 제법 규모가 있는 나라다. 당시도 지금처럼 난세(亂世)였다.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당연히 정치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전쟁’이다. 논어에 군사 이야기가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다. ‘수레’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다(서양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벤허 같은 영화들에서 보이는 그런 전차다). 당시 전투는 요즘같은 전면전이 아니라, 넓은 평원에서 무장들이 수레전차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보병과 치중대가 있긴 했으나 주력이 아닌 지원병력이었다.(보병이 주력이 되는 건 전국시대 들어서다.) 그러니 한 나라의 전력은 일단 수레 숫자로 결정된다. 전차수레 한 대에는 말 모는 사람, 활 쏘는 이, 창잡이 등 모두 세 명이 올라탄다. 천승이면 수레 병력만 해도 3천 명이다. 여기에 치중수레(군수 트럭)와 보병까지 붙으면 상당 규모가 된다. 그러니 천승을 부릴 나라라면 제법 국력(군사력과 경제력. 부국강병)이 있는 나라, 계급분화가 상당하고, 경제적 이해관계도 복잡한 나라가 되겠다. 

부국강병 
참고로, 당시 지배층의 필수 기술과목인 육예(六藝), 즉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중 사는 활쏘기고, 어는 말몰이다. 그만큼 전투력은 지배층의 주요덕목이었다.  일반백성들이 전쟁의 주역으로 참전할 수는 없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참전권은 지배층의 특권이었다. 전공을 세워 지배력을 더 공고히 할 권한을 천한 백성들에게 함부로 내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게다가 세상의 사람 숫자도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때였다. 전쟁에 백성까지 동원해 전사자가 많아지면 국력이 절대적으로 약해지니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셈이 되는 것이다. 전쟁은 영웅들의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군주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인력 확충에 온힘을 쏟았다. 첫째는 통치를 도울 인재를 많이 확보하는 일, 둘은 인구수 자체를 많이 늘리는 일. 국경이나 국민이라는 개념이 지금같이 뚜렷하지 않아 인구 이동은 자유로웠다. 주민등록증이 왠말이냐. 어디어디 땅이 살기 좋다고 소문이 나면 일반 백성들은 쉽게 거주를 옮겼다. 지배층으로서는 백성들이 빠져나가는 일이 골머리일 수 밖에 없었다. 피지배층이 없는 지배, 사람 쪽수 모자라는 부국강병은 언감생심이니까. 제 살기 위해서라도 ‘좋은’ 정치를 해야 했다. 수요 측면에서 제자백가라는 인재 무리, 사(士) 계층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공자는 그 제자백가의 근원이자 출발이었다. 

사람 귀한 줄
말 나온 김에 당시 주나라 정치제도의 근간 즉 봉건신분질서도 잠시 들여다보자. 최상층 천자(天子. 천자는 하늘의 자식, 군자와 대비된다)를 필두로 제후(諸侯), 대부(大夫), 사(士), 서인(庶人)으로 구성되는 위계질서가 있었다. 중앙 종가집인 주나라는 천자의 나라다. 천자이 호칭은 왕(王)이다. 왕은 천하에 하나다. 이런 왕에게서 직접 봉토를 받으면 제후가 된다. 제후는 공(公)이라 불리고, 그 봉토는 국(國)이라 불린다. 논어에 등장하는 제나라, 노나라, 위나라 등은 모두 제후의 나라인 국(國)이다. 종가집인 주나라의 작은집들이다. 이어 제후에게서 식읍(食邑)을 받는 대부는 경(卿)이라 불렀다. 제후가 중앙 왕실에서 파견된 자라면 대부는 토착세력이다. 군사력으로 천하 패권을 잡았다 해도 지방 구석구석까지 다스리려면 토호세력의 협조를 얻지 않을 수 없다. 토호들로서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러다가 힘의 균형이 깨지면 토호 즉 대부들이 중앙세력 즉 제후들에게 대들기도 했는데, 여기서 ‘하극상’이라는 말이 유래한다. 공자는 세상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이 하극상을 극혐한다. 논어에는 맹손, 손숙, 계손이라는 소위 삼환(三桓) 집안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은 하극상을 부릴 정도로 세력이 막강한 노나라의 대부들이다. 대부는 관리가 아니라 작으나마 성읍(요새 행정 단위인 읍면동 할 때의 邑)을 보유한 군사 경제 정치의 독립단위다. 이에 비해 사(士. 계층이자 호칭)는 식읍을 보유하지 않고 녹(祿. 급료)을 받는 관리다. 대부의 성읍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인(人)이라 했고, 성안에 살 자격이 안되어 도성 밖(野)에 사는 최하층민을 민(民)이라 했다. 인(人)은 대략 사(士) 계급이다. 인과 민은 뚜렷이 구별되는 계급이다. 공자는 사(士)다. 뜻을 펼칠 권한을 얻고자 공자는 대부되기에 상당히 애썼으나 끝내 대부에 오르지는 못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절용은 인(人)의 일 즉 사 계급이 염두에 둘 일이고, 애인(愛人) 또한 사와 연관된 일이었다. 사민(使民)은 도성 밖 최하층민을 염두에 둔 말인데, 본문에만 한정하면 이들을 전쟁에 동원할 경우 농번기는 피하라는 말인데, 확대해석 해보면 사회적 약자들의 복리와 연관지어 볼 수 있겠다.        

공자님 말씀
이제 위정자의 마음자세에 대한 공자의 생각이 어떻게 전개되나를 보자. 공자는 세 차원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첫째, 위정자의 자세다. 경사이신(敬事而信). 나랏일을 돌보려면 바른 길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까 두려운 마음으로 임하여, 거짓과 위선과 사리(私利)와 편법과 반칙 등 온갖 정치적 악행을 경계하고 국민들의 신망을 얻도록 하라. 둘째는 공직자의 공무수행 지침이다.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 공직자는 국민세금이 귀한 줄 알아 나라살림을 내 살림하듯 알뜰히 하고(節用), 두루 백성의 살림을 아껴 복리를 증진시켜라. 셋째, 일선행정 시행시기다. 사민이시(使民以時).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행 적기(適期)라는 게 있다. 백성들의 일상을 흩트릴 정책은 아니함만 못하다. 특히 그 여파가 심할 사회적 약자 계층에 더 주의해야 한다. 요약하면,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위정자의 자세는 경(敬), 신(信), 절(節), 애(愛), 시(時) 다섯이다. 모두 ‘공자님 말씀’이다.  
이 다섯을 요약하면 공심(公心)이다. 사심(私心)은 곤란하다. 모든 일에는 그 일에 합당한 자세가 있게 마련이니까, 공직은 공심으로 해야 마땅하다. 자세가 나와야 일이 잘 풀리는 것이니까.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공직에서 공심을 찾기란 참 어렵다. 꼴불견이 더 빈번하다. 왜 그럴까. 일단 공심 지닌 이가 많지 않다는 것이고, 설사 있더라도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게다가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공심보다는 강한 카리스마를 대장감으로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직 호모 사피엔스에게 남아있는 야만성의 발로다. 문명화가 덜 됐다는 얘긴데, 그래서 공자는 문화영웅을 그리워하고 자임했나 보다. 우리도 포도대장보다는 차라리 줄타는 광대를 ‘왕의 남자’로 뽑았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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