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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의 고전평론] 다시 고전을 읽다 - 논어 (10)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세상

20230822일 (화) 11:3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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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편 1-9) 증자가 말했다. “삶의 마감에 신중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愼終追遠), 유가에서 아주 중시하는 말이다. 좀 풀어보면 이렇다.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서도 어떤 계기가 있을라치면 죽음에 대해 좀 신중하고 진지해지는 시간도 갖자. 그리고 한 삶이 마무리될 경우 최대한 존중과 예의로 그이를 보내드리자. 나아가 개인적으로든 사회문화적으로든 그런 인간 한계를 의식하는 에토스를 애써 함양하자. 그 연장선에서 조상에 대한 추모의 념()도 잘 간직하는 문화를 가꾸자.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좀 더 후덕하게 되어, 즉 인성들이 좋아져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이 한걸음 더 가까워질 것이다.

 

신종추원

우리네 삶은 통과의례들로 이어진다.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의 삶을 새출발하는 계기로, 동시에 사회의 질서를 되짚는 계기로, 이 통과의례를 매우 중시했다. 대표적인 게 관혼상제다. 관례(성인식이다. 전통사회에서 일정 연령에 이른 자를 정식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신고식이다. 사회적 역할에 대한 책임의식을 요체로 한다. 세상에서 사람 구실을 해야 함을 일깨우는 의례다. 요새는 안 지낸다. 생일파티 정도가 이를 대체했다고나 할까. 물론 둘은 참 다르다.), 혼례는 삶의 의례요, 상례(장례식), 제례(제사)는 죽음과 관련된다. 소위 근대화 이후 이같은 관혼상제 통과의례는 많이 퇴색됐다. 가치관이 다원화되고 이동이 잦아진 산업사회에서는 그 사회적 기능이 별로기 때문이다. 암튼 신종추원을 통해 공자는 상례와 제례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초상 잘 치고, 제사 잘 모시면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공자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냥 꼰대의 넋두리일 뿐일까. 일단 공자가 노리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죽음, 즉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 내지는 자각이요, 둘은 조상추모를 통한 개인 내지 집단의 정체성 확보다. 이 둘이 살아있는 사회는 질서와 화합이 잘 되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얘기가 되겠다.

 

백 년도 못 살면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이 마치 천 년을 살 것처럼 기고만장하지만, 제 아무리 까불고 설쳐봤자 결국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 삶의 엄연한 이 현실을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사는 세상. 그래서 조금 겸손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는 세상. 죽음 앞에서는 대개 착해진다는 존재론적 진실이 작동하는 세상. 잘났다고 거만 떨면 뒤에서라도 손가락질 하는 세상. 어차피 필멸의 존재지만 그렇기에 서로가 남일같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세상. 동병상련. 인정(人情)과 인간미가 살아있는 세상. 이런 세상이 공자가 꿈꾼 세상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세계 최강의 부국강병 로마시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군중들의 환호 속에 로마시내를 퍼레이드하며 지나가는 개선문에 떡하니 새겨진 경구다. 빛나는 순간에 찬물을 끼얹자는 게 아니라. 잘났다 싶을 때 오히려 까불지 않아야 로마가 영원하리라는 아주 현실적인 스스로의 경계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초상을 경건히 성대히 치른 것도 본뜻은 거기에 있었다. 유한하나 엄정한 생명에 대한 존중, 그리고 아직 산 자들의 삶에 대한 겸허. 비록 허례허식으로 왜곡돼 오히려 사회 병폐가 되기도 했지만 본뜻은 그랬다는 말이다. 신종(愼終)이다.

 

우린 남이 아니네

제사는 어떤가. 상례 제례 둘은 죽음과 관련되지만, 사실 상례는 흉례고, 제례는 길례였다. 제사는 가족 축제(?)였다. 상실의 슬픔은 이제 기억의 저편이고, 추모의 그리움이 혈육들을 격려한다. 한 핏줄이 한 자리에 모여 먹거리(제물)를 나누면서 우리가 한 뿌리임을, 하나임을 확인하는 축제의 자리. 종의 보존을 기획하는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잘 구현되는 자리.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즉 내 편이 많다는 진실에서 느껴지는 안도감. 그리고 죽은 자가 이같이 후손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으니, 나 또한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오래 살아있을 것이라는 영원성 향연. 이 모든 걸 가능케 한 조상에 대한 미더움. 나를 돌봐주실 것이라는 든든함. 그 원초적 생명력과 화합을 함으로 야기되는 초월적 힘과의 화해. 그 화해를 통한 가족끼리의 수평적 연대. 그건 경건하면서도 즐거운 축제다. 원래 조상숭배는 종교의 가장 원초적 형태 중 하나다.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하는 위로와 화합과 희망이 가져다 주는 우주질서의 확보. 추원(追遠)이다.

그래서 신종과 추원의 의례가 잘 작동하는 사회는 저절로 민심이, 인성이 후덕해 져서 살기 좋은 화합과 협동의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게 공자의 생각이었다. 겸허와 예의와 절제의 세상, 즉 매너 있는 인간들이 주류인 세상. 왠만한 인간이라면 초상집에서는 까불지 않고, 제사 지낼 때 난동 부리지 않으니, 공자 생각의 일단이 일리가 있다 싶다.

 

각박해진 세상

하지만 그건 정주 농경 사회를 전제한다. 늘 보던 얼굴들과 살고, 농삿일은 품앗이를 하는 게 좋고, 재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아귀다툼 해봤자 나에게 떨어질 게 별로 없고, 사람들이 요즘보다는 정보에 덜 노출돼 순박한 데가 있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나 가당한 일이다. 맞다. 자연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농업이 아니라, 자연을 개조하는 공업과 자연 아닌 사회를 상대하는 상업이 생업의 주류를 이루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초상이나 제사를 아무리 잘 모셔 봤자. 민심이 후덕해질 리가 없지 싶다. 그러니 요새는 사람들도 알아서 적당히 모양만 갖추는 것이고. 심지어는 무한경쟁 사회, 승자 독식 사회, 부활전 없는 사회에서 제사 따위로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해봤자 낙오만 될 뿐이니,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까지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 공자님은 안녕히 가세요인가.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좋은 말씀들은 그 한계 속에서도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보여 준다. 공자가 공자인 이유는 이같은 보편적 진실 가운데 하나를 인류 정신사상 최초로 설파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휴머니즘이다. 인문정신이다.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다. (신이나 돈이 아니라 사람 말이다.) 인간 가치 존중이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접하는 세상이다. (공자는 휴머니즘의 원조다. 고대 그리스보다 시기적으로는 비슷하나 그 싱싱함은 더 또렷하다.) 신종추원의 정신도 이에 바탕한다. 최소한의 양심, 그 마음자리를 살리는 일이다.

 

나는 휴머니스트

그렇다면 이 휴머니즘 보편성이 오늘에도 유효할까. 국민이 부국강병의 수단에 불과하고, 사람이 자본과 기술의 노예로 전락하고, 사람 가치가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부의 척도로만 재단되고, 타인은 내 인생길에 방해 요소로만 여겨지는 몰인간적 세상에서 말이다. 공자가 환생해 오늘 세상을 본다면, 그 풍요와 다양성과 역동성에 깜짝 놀라겠지만, 사람 온기와 향기를 찾을 길 없어 무척 아득해 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아득함 속에서도 다시 힘을 내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칠까. 그랬을 것 같다. 휴머니스트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 어떻게?. 깨어 있는 개인의 도덕적 각성에 기대어? 아니. 공자는 사람들이 맑으려면 세상이 먼저 맑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니까. 그래서 공자는 법이나 제도를 만들더라도 사람의 예쁜 본성을 살릴 수 있는 기저를 강조한다. 맑은 사람이 더 존중받고, 맑은 사람이 더 큰 이득을 보는, 그래서 사람들이 맑기를 노력하도록 유도하는 사회 시스템 말이다. 썩은 정신, 삐뚤어진 정신, 꽁꽁 닫힌 정신을 씻어낼 에토스와 관습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공자는 사회지도자, 리더의 각성에 바탕한 덕치(德治)를 말한다. (법치로는 역부족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그런 제도를 만드는 건 리더들 몫이니까. 그런 리더를 공자는 군자라 칭했다.

고상하지만 순진한 생각인가. 인간의 야만성을 도외시한 지식인의 망상 아닌가. 하지만 공자는 사람이 그리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게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잠깐. 트랜스 휴머니즘을 말하는 세상에서 전근대적휴머니즘이 통하기나 할까. 모를 일이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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