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서브메뉴로 바로가기

[전인철 칼럼] 보수가 살아나야 한다

치열한 자기성찰로 철학과 품격을 다시 재건해야 할 시점

20200419일 (일) 17:32 입력 20200419일 (일) 17:32 수정

  • 축소
  • 확대
  • 이메일 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보내기
  • 트위터 보내기

21대 총선이 끝났다. 보수가 유례없는 참패의 쓴잔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진보는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실종돼 의회권력은 다시 거대 양당 체제로 환원했다. 사실 이 양당도 한쪽이 크게 기울어졌다. 심히 우려되는 형국이다. 보수를 살려야 한다.

 

정치라는 게 그렇다. 우리는 정치를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로만 생각한다. 소위 정치엘리트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 세력을 모아 정당을 만들고, 권력게임을 펼치고, 그래서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그 권력을 행사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홍보하고, 심지어는 선전선동도 마다 않는 그런 일련의 행위들 말이다. 일견 맞다. 소위 민주주의 사회의 현실정치고 대중정치다.

그러나 이런 좁은 의미의 정치 말고 우리는 넒은 의미의 정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한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맹수도, 호랑이는 혼자 살고 사자는 같이 산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도록 돼 있는 동물이다. 물질적 자원 확보를 위해서도 그렇고,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아무리 나는 자연인이다해도 간접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또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며 산다. 게다가 몸은 비록 저자거리를 떠나 산다고 해도 마음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뻔한 얘기를 왜 하냐면, 우리는 이걸 자주 잊고 살기 때문이다. 잊고 살면 나도 모르게 사회적 불찰을 저지르기 쉽다. 결국 그 피해는 돌고 돌아서라도 나에게 오기 마련이고.

 

암튼, 이렇게 같이 산다는 게 사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고, 기호도 다르고 다 다른데, 개개인 각자는 다 자기 식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충돌과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합의점을 찾아내고, 그래서 공동체의 살림을 잘 꾸리고,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잡고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넓은 의미의 정치다. 이는 한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 사이라도, 살면서 이 이해관계 조절을 잘못하면 그 가정은 맨날 불화만 쌓인다. 그래서 사회적 동물이란 말은 곧 정치적 동물이란 말과 같은 말이 된다.

 

좁은 의미든 넓은 의미든 정치를 하자면 일단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힘대 힘의 충돌만 남을 뿐이다. 상대를 인정 않는 것은 상대를 라이벌이 아닌 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인데,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 겨루어야 할 상대지만, 적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섬멸해야 할 대상이다.

물론 현실정치는 권력투쟁의 측면이 다분하다. 권력은 나누어 갖기가 참 어렵다. 나누어진 권력은 권력 맛이 안난다. 그러니, 승자독식 게임이 되기 쉽다. 이런 게임에서는 꼭 상대를 완전 궤멸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또 그런 모습들이 많이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언론에서도 아예 이런 뉘앙스의 어휘를 앞세우며 보도를 하기도 한다.

 

1927년 독일에서는 한 권의 책이 나와 학계의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칼 슈미트라는 정치철학자가 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후일 나치독재와 일정 관련을 맺기도 한다.) 정치를 선악의 대립으로 본 것이다. 악은 척결 대상이다.

편 가르기, 진영싸움 따위는 인간의 권력의지, 지배욕, 승부욕을 한껏 자극하는 짜릿한 말들이다. 하지만 정치는 결코 전쟁이 아니다. “권력게임은 전쟁과 스포츠의 중간 그 어디쯤에 자리한다는 말이 있다. 적실한 말이다.

정치가 스포츠같이 룰도 있고, 심판도 있고, 패널티도 있는 그런 게임은 아니지만, 전쟁이 되어서도 안된다. 애당초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자는 작업인데, 이 본령을 망각하고 정치를 전쟁으로 만들면 결국은 모두 공멸한다. 하지만, 남미의 축구전쟁처럼 스포츠가 촉발제가 되어 실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정치가 전쟁이 되는 건 자칫 하는 순간이다. 선거철에는 더 그렇다. 특히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이런 우려가 더 크다.

 

보수를 살리자면서 말이 길었다. 이유는 이렇다. 필자는 보수의 이번 총선 패배의 기저에는 정치를 과도하게 전쟁 쪽으로 몰고 간 보수의 스탠스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이런 태도는 유권자들에게 신뢰감과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런 과도한 위화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정치는 갈등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어야 한다. 이를 도외시하면 되레 지지를 잃는다.

혹자는 여당이 협치는 고사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정치를 벌여, 힘없는 야당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본다면 그리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소리에 불과하다. 국민들이 이미 표로 판정을 한 마당에 그런 핑계는 부질없다.

물론 이런 편향된 스탠스 설정보다는 야당의 무리한 공천, 막판 막말, 코로나 정국 등을 패인으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야당이 이겼을까.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면 이들이 패인인 게 맞지만, 그 밑바닥에는 야당의 편향된 스탠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 왜 보수는 이런 자세를 취했을까. 한 마디로 시대적 상황판단 미스 때문이다. 촛불정국으로 탄핵을 겪으면서, 보수는 큰 당혹감을 맛보았다. 쭉 대한민국의 주류로 살았고, 기득권을 지켜왔으며, 설마 우리가, 하다가 그런 상황을 맞다보니 멘붕이 왔다. 기존의 보수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상황을 보며, 이를 외면하고 부정해 버린, 그런 그림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된 과정과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못했고, 그야말로 수구에 더 집착했다. 국민들을 나라 주인이 아닌 통치 대상으로만 봤고, 있지도 않은 샤이보수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며 안주했다. 달라진 세상을 직시할 눈이 없었고, 용기가 없었다. 한 마디로 세상 바뀐지 몰랐고, 부정했다. 황교안 대표는 당 대표 취임사에서 이제 전쟁이라 했고, 총선 유세 중 상대편 이낙연 후보가 서로 미워하지 말자는 말에 미워할 꺼야로 응답했다.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을 폄훼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도 보수의 왜곡된 상황인식을 대표하는 대표단수 일 뿐이다.

 

보수가 살아나야 한다. ? 대한민국이 잘 살기 위해서다. 보수도 살고 진보도 살고, 그래야 건강한 세상이 가능하다. 새는 양쪽 날개로 날고, 자동차도 엔진과 브레이크가 다 좋아야 한다. 답은 하나다. 보수가 달라져야 한다. 보수의 참 정신은 옛것 지키기가 아니라 신중히 변화하기. 세상은 늘 변하므로 이에 부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이대로 쭉은 보수가 아니다. 달라지려면 치열한 자기성찰이 가장 먼저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게 보수다. 보수의 철학과 품격과 전통이 새삼 그리운 시절이다.

 

전인철 편집주간



지역 칼럼
  • 이전
    이전기사
    [전인철 칼럼] 투표, 꼭 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