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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같은 때론 풀 같은, 마을을 그리는 화가

[인터뷰 공감] 문화나눔 옻골 최수환 대표

20150727일 (월) 14:0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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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지역의 공동체와 마을, 그중에서도 문화와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화가이자 목수이며 마을기업 운영자이기도 한 강북지역풀뿌리단체협의회 최수환 대표다.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지난 금요일, 그의 작업실이자 동네 사람들의 아지트인 도남동 문화나눔옻골에서 그를 만났다. 뜨거운 날씨였지만 마당 한가득 놓인 각종 목재와 공구들 사이에서 그날도 역시 한창 땀을 흘리며 나무로 뭔가를 만드는 중이었다.
 


 

누구나 처음 그를 만나면 특유의 외모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우선 반백에 가까운 머리가 길게 자란 그는 영락없는 예술가다. 그런데 생활한복을 즐겨 입는 모습과 함께 보면 산골 마을 도인 같은 느낌도 들었다.
외모에서 쉽게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그는 63년생, 올해 53세다. 고향인 영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물었는데 의외로 한때 꿈이 야구선수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주 조용하고 평범한 아이였는데 나름 야구선수가 꿈이었다. 제대로 해 본 적은 없다.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4학년부터 들어갈 수 있었다. 4학년이 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4학년이 되는 해에 야구부가 해체됐다. 지금도 야구를 즐겨본다.”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어쩌다 미술반에 들어가면서 평생 그와 함께한 그림과 인연을 맺는다. 물론 그전에도 그림에 관심은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를 가르치던 미술 선생님이 당시 시국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하고 건강 등의 문제까지 겹쳐 고등학교를 한해 쉬었다. 이 과정에서 학교생활 적응도 힘들어져 대구로 다니던 학교를 다시 영천으로 옮겼다. 다만 항상 모든 곳에 그림이 있었다. 쉬는 동안도 학교를 옮길 때도 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대학 시절도 이런 과정은 이어졌다. 83년 경북대 미대에 전면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곧바로 휴학 아닌 휴학을 했다. 군대 문제도 해결하고 이런저런 방황을 하던 차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등록금 문제가 걸렸다. 제적 상태였던 그는 다시 대학입시를 치렀고 똑같은 경북대 미대에 87년 신입생으로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런데 정작 다시 시작한 대학생활은 온통 거리에서 보냈다. 87년 6월 항쟁과 뒤이은 학내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시절에도 그는 늘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에 그린 작품이 아닌 대형 걸개그림이라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후에도 대경민족미술인협회, 대구민예총 등 다양한 미술 관련 사회단체 활동을 20년 가까이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 와중에도 8번에 걸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그렇게 그는 천상 화가였다.
 

 

그러던 중 그는 2007년 강북지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지역에 살기 시작한 건 그보다 5년 앞서지만, 이때 문화나눔옻골이 문을 연 것이다.
 

“무엇보다 동네에서 문화, 예술을 접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작지만 각종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와 주민들이 배우러 올 수 있는 목공방을 함께 운영했다. 생활에서 쉽게 예술을 만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 사귀려고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엔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마을도서관은 물론 다양한 지역의 단체와 시설들이 많아져 접할 곳이 많지만, 이때만 해도 문화나눔옻골만 덩그러니 섬처럼 떠 있었다고 한다. 이후 100여 가지에 이르는 각종 강좌와 교육, 체험, 캠프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강북지역의 마을공동체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콘텐츠 제공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지난해 원래 있던 공간에서 지금은 도남동 시골 가장 구석진 곳으로 옮겨왔지만 문화나눔옻골은 여전히 동네 사람들의 아지트다. 또한, 지금도 그는 매년 진행되는 강북어린이날큰잔치와 가을의 논두렁밭두렁 축제의 책임을 지고 있다. 마을을 위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그에게 최근 들어 인생의 전환점이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동네 뒷산에서 등산을 하다가 길가에 자란 풀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발에 밟히면서도 꿋꿋이 번져가는 질경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뻗어 가는 넝쿨, 햇빛만 비추면 어디든 싹을 틔우는 풀들의 모습이 참 자유로워 보였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사명감, 치열함이 가득했던 그때까지의 인생이 그 순간 180도 방향전환을 하게 됐다. 인생을 돌아보면 25년은 주어진 데로, 25년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았다. 이제 25년은 나를 위해 내가 하고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그는 다양한 마을의 모임에서 늘 자연스러움과 자발성, 마을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마을을 즐기고 함께할 수 있는 우리 지역이 됐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달부터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함지마을포럼이라는 새로운 모임도 만들었다. 마을주민이라면 누구나 와서 함께 이야기하고 새로운 구상을 작당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여전히 서민들은 힘들지만 어쨌든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주말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동네와 마을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마을이 더 필요해지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정책적으로 마을을 통해 주민들이 성장하고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마을에서 그의 모습을 앞으로도 많이 볼 수 있을 테지만 올해부터 내년까지 그는 다시 그림에 집중할 계획이다. 스스로를 설명하는 많은 직업과 직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는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가장 어울린다. 다음 전시회가 벌써 기다려진다.
 

요즘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처럼 땅에 든든히 뿌리박은 나무 같은 사람, 때론 길가에 자라는 이름 모를 풀처럼 어디로든 뻗어 가는 사람, 최수환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나무처럼 풀처럼 마을에 함께 살고 있어서 참 좋다.  

 

강북신문 김지형 기자
earth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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