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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속 동심이 깃든 풍경…

[인터뷰 공감] 공예가 이우열

20151228일 (월) 11:1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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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과학대학교 보석감정마케팅과 해암(海巖) 이우열 교수(55세)는 수업이 없는 시간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금속을 만진다. 몇 시간을 깎고 구부리다 보면 어느새 새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매일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만나는 이우열 교수는 18회의 개인전을 연 지역 공예가다.

 

 

 

◆ 이 교수도 ‘응답하라 1988’

 

대구에 거주한 지 올해로 23년이 되는 이 교수는 경기도 포천이 고향이다. 포천의 시골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집안 사정에 따라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살다가 대구과학대학교 교수직을 맡으면서 대구로 왔다. 지금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삼양극장’, ‘쌍문여고’ 등 배경은 그가 서울에 살 적 누볐던 곳들이다. 그를 비롯한 할아버지, 부모님, 동생 등 그의 가족은 서울 달동네의 방 한 칸에서 복작대며 지냈다.


지금 보석을 만드는 이 교수는 사실 ‘공돌이’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찰흙을 만지고 그림을 그리면서 노는 등 공예에 소질을 보였지만 그때는 생계를 우선해야 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철도청에서 열차 수리를 했던 그는 문득 ‘이렇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고 서울산업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전세를 전전하는 시절도 있었다. 중2 때는 아버지가 사과 장사를 했는데, 손도 시리고 추웠지만 내가 사과 손수레를 봐줘야 아버지가 식사를 할 수 있으니까 내가 도와야 했다. 그러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부끄럽기도 했다. 집안 사정이 그렇다 보니 대학갈 엄두는 못 내고 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공고를 나와서 철도청에서 열차 수리하는 일을 했는데, 적성에도 맞지 않았고 60~70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군대에 다녀와서 다시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서 처음 배운 건 산업디자인과 그래픽. 그림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동화 작가를 꿈꿨다. 그러다 남들과는 좀 다른 것을 원했던 그는 금속을 만지기 시작했다. 금속이 가진 희소성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처음에는 그림책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시각디자인은 하는 사람이 많았고, 금속 공예는 불을 다루는 등 위험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안 했다. 그래서 3학년 때 금속으로 방향을 바꿨다. 나는 공고를 나와서 불을 만질 줄 아니까, 남들은 그림으로 무언가를 표현할 때 나는 금속으로 한번 표현해보자고 생각했다. 그 일이 싫어서 피해 왔는데 결국 그 일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 없는 경험은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 시골에서 느낀 감성을 고스란히

 

 

 

그가 주로 만드는 작품은 브로치이다. 보석을 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년. 보석을 구해도 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보석을 어떻게 꾸미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구한 보석은 제 짝을 만날 때까지 4~5년씩 묵혀두기도 한다. 새, 나비 등 금속을 이용한 모형은 몇 시간 만에 만든다. 이렇게 부분 부분을 만들어 이야기를 입히고 한 군데로 모으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브로치는 보석, 은, 금속으로 표현한 작은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벽에 브로치라는 작품이 걸리고 거기에 스토리가 들어간다. 보석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충분히 개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브로치를 좋아한다.”


이 교수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봄’이다. ‘취마노’라는 옥 종류의 보석을 사용했는데, 중간을 자르면 빈 공간이 있는 보석이다. ‘봄’에 쓰인 취마노는 중간에 꽃병 모양의 공간이 있는 보석으로, 여기에 금속으로 만든 나비와 진주를 달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만든 후 판매를 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일관되게 등장하는 것들이 있다. 작품에는 ‘새’와 ‘나비’가 자주 얼굴을 내밀고, 작품 제목에는 ‘꿈’, ‘희망’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 교수는 새를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태초부터 하늘을 동경했고, 날기 위해 끝없는 모험과 도전을 했다. 새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아무리 작은 새라도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다. 그래서 새는 ‘비상’과 ‘꿈’을 뜻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꿈과 희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품을 통해 그런 것들을 표현했다.”

 

 


공예가라고 해서 보석·금속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낙서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는 방천시장에서 김밥 파는 할머니, 채소 파는 아줌마 등 시장 풍경 80여 장을 2년 동안 그려서 스케치 전을 열기도 했다.


이 교수는 사실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지인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벽화 중 하나를 그린 장본인이다. 그는 2009년부터 작년까지 방천시장에 공방을 두고 문전성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당시 공방 이름은 ‘별따공방’. 하늘의 별을 딴다는 의미도 있고, ‘별난 소와 따오기’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별난 소는 소띠인 이 교수 자신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동심이 느껴진다. 그는 한 달 뒤면 56세, 흔히 동심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나이다. 그럼에도 작품에는 유년 시절 시골에서 뛰놀았던 경험에서 배어 나온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작품은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포천에서 살 때 할머니를 따라 밤도 줍고, 여름에는 가재와 곤충을 잡으러 다니면서 자랐다. 할머니가 박쥐를 잡아와서 방 안에 두고 키운 적도 있다. 지금도 자연을 접하고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것들이 작품에도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보석과 금속을 통해 자신의 꿈에 도달한 이 교수의 남은 목표는 사람들과 좀 더 소통하는 것이다.

 
“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같이 즐거워하고 누구나 공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석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기 마련인데, 작품성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계속 연구 중이다.”


그의 작품은 내년 상반기에 열릴 전시회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정은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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