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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개혁은 왜 실패로 돌아갔나

인물로 보는 역사 이야기 (1)-고려 공민왕

20180723일 (월) 09:06 입력 20180723일 (월) 15: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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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 9월 21일, 가을 기운이 점차 짙어가는 개경 왕궁의 왕의 침소. 스러져가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왕이 총애하던 신하들의 손에 시해당하고 만다. 비참하고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 그는 어떤 인물이었고,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그의 삶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본 연재물은 우리 역사에서 명멸해간 인물들 이야기다. 역사는 어차피 사람이 만들어낸다. 사건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도 좋은 이야기가 되지만 역시 사람 이야기가 재밌다. 그 재미 속에서 의미도 같이 찾아가는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이야기는 조선시대 인물들 중심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삼국시대 이야기나 고려 이야기는 너무 먼 옛날같아 사실 체감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바탕은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는가. 
조선을 이야기하려면 건국 배경이 되는 고려말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 중 핵심은 공민왕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공민왕부터 시작된다.


- 개성 근교에 자리한 공민왕릉. 노국대장공주와 함께한, 고려왕릉 가운데 유일한 부부 쌍릉으로 경관이 수려하다. 둘의 사랑만큼이나. <사진출처=위키백과>

친원 기득권 세력에 맞서다

우리의 주인공 공민왕은 개혁군주로 알려져 있다. 왕은 무엇을 바꾸고 싶었던 것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100년 가까운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신정권 이래 너무나 오랫동안 나라의 피를 빨아먹던 기득권 집단(소위 권문세족)을 척결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앞의 일은 대외적 개혁이고, 뒤의 일은 내부개혁이지만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당시 기득권 집단은 곧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부원파’다.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들이다.
왕은 1351년 10월, 22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열 두 살에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10여 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원나라에 있을 때도 영특한데다 몸가짐도 곧아서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 
당시 원나라는 말기로 접어들면서 정세가 불안했다. ‘사위나라’ 고려의 정치적 안정은 중요했다. 원은 어린 충정왕을 끌어내리고 삼촌인 그를 공민왕을 세운다. 원나라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것도 한몫 했으리라.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

그러나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원의 기대를 저버리고 과감히 원나라를 배격하는   개혁정치를 단행한다. 몽고식 변발과 옷을 벗어던지고,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기철 일당을 숙청한다. 드라마로도 방영된 원나라 황후(기황후)의 일족이다. 원의 내정에도 소상했던 왕은 잦은 반란으로 원나라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에 빼앗겼던 동북면 일대 땅도 되찾는다. (이 전쟁에서 이성계가 맹활약, 중앙무대에 얼굴을 알린다.)
그러나 역시 개혁은 쉽지 않았다.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거셌다. 정변과 원나라 사주를 받은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 왕이 시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 원에 밀린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도읍을 버리고 피난까지 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토록 아끼던 아내 노국대장 공주가 출산 중에 죽고 만다. 왕은 왕비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밤낮 울었다 한다. 먹고 마시기를 잊었으니, 정사를 제대로 돌보았겠는가. 왕은 탈진하고 좌절한다. 
못다한 내정개혁을 신돈이라는 승려출신 신하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나 방황의 길로 들어선다. (신돈의 개혁 이야기는 다음 호로 넘긴다.)

왕의 기개는 어디로 갔는가

집권 초기 개혁 깃발을 드높이던 왕의 기개는 어디로 갔는가. 기개는 고사하고 인격마저 무너져내린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이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지만, 글쎄, 사람사는 일이 어디 꼭 한 가지 때문만으로 일어날까. 계기는 하나라도 원인은 수만 가지가 겹치고 얽히는 법이다. 처신이 무겁고 자기절제도 강하던 그도 거듭되는 환난과 저항에 지치고 만 것이리라. 
결국 왕은 신돈마저 실각한 뒤로 정신줄마저 놓았다. ‘고려 개혁, 다 부질없는 짓거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단 말인가.’
고관 자식들 가운데 ‘예쁜 사내아이들’을 뽑아 자제위(子弟衛)라는 왕 시중기관을 만들고는 동성애와 관음증에 빠져 지내는 등 기괴한 유희를 즐겼다. 결국 이 일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쌍화점’을 보면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공민왕은 이즈음 뒤를 이을 왕자를 갈구했다. 손놓아버린 개혁에 대한 한 가닥 미련인가. 그러나 여색을 싫어한 탓인지 후사를 보지 못한다.(나중에 우왕이 되는 자식이 하나 있긴 하다.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왕은 이상한 획책을 부린다. 후사를 위해 자제위 미소년들과 자신의 후궁들을 억지로 짝지어 대리합궁을 시킨 것이다. 결국 익비라는 후궁이 홍륜이라는 자제위 소년의 아이를 가진다. 왕은 이제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을 없애야 한다. 왕자의 출생의 비밀.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왕실의 흑막이다. 

촛불은 약했고 바람은 거셌다

왕이 자신들을 죽이려한다는 것을 먼저 눈치챈 홍윤과 내시 최만생 등은 단지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하는 단순한 생각 하나로 한밤중 왕의 침소를 급습,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왕을 마구 찔러댔다. 왕의 나이 45세였다. 
스러져가는 고려의 마지막 촛불. 그러나 촛불은 미약했고 바람은 거셌다. 그 바람막아줄 병풍 하나도 제대로 없었다. 
왕의 개혁은 왜 실패했을까. 한마디로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고려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고, 왕을 받쳐주고 지지해 줄 세력은 거의 없었다. 신진사대부라 이르는 일부 개혁지향적 젊은 유학자들이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도 기득권층에 속했다. 개혁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의지가 됐던 왕비마저 운명을 달리하자 왕은 더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는 세력이 한다. 개혁국면에서는 더 그렇다. 깨어있는 리더의 절대고독. 공민왕은 결국 이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이상이 높았던 왕.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 이상이 좌절되는 순간, 그 열정은 병적 타락상으로 돌아서버린 것이다.  

글=전인철 주필

<알림=새 시리즈 연재합니다>

본지는 이번 173호(7월 26일자)부터 전인철 주필의 새 시리즈물 2개를 연재합니다. 
 9면=‘역사 속 인물 이야기’
10면=‘함사세요-함께 사는 세상이요’
전인철 주필은 25여 년 언론계에서 종사하며 우리 사회의 명암을 증언해 온 언론인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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