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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호의 이야기마당] 역사를 만든 인연, 전태일과 조영래

20210616일 (수) 09:4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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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1113일 근로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결한 전태일은 생전에 평화시장에서 함께 일하는 시다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안타까워했다. 당시에 태일은 새벽에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이소선이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태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아이들이 저희 공장에서 시다로 일해요. 종일 굶으며 일을 해요. 일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는데 시다들이 너무 배고파하기에 버스비로 풀빵을 사서 나눠 줬어요. 열심히 뛰어오는데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그때 헌옷 장사를 하던 이소선은 아들이 추위에 덜덜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 겨울 점퍼가 생기자 팔지 않고 태일에게 입혔다. 그런데 며칠 뒤에 아들이 점퍼를 입지 않고 집에 왔다.

잠바는 우쨌노?”

깜박 잊고 공장에 벗어 두고 왔어요.”

아니 며칠째 놔두고 다니냐. 또 누구 준 거 아니냐.”

태일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재단 보조가 들어왔는데, 제 작업복보다 더 얇은 옷을 입고 다녀서요. 그것도 찢어진 것을.”

이소선은 태일이를 말릴 수도 없었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 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어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엄마가 안 하면 그걸로 끝난다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란 말도 하고 그때 뭐 별말 다 했지.

어떤 물질이나 어떤 유혹에도 타협하지 마세요. 내 부탁한 거 꼭 들어주시겠죠?”

참말로 기가 차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듣고만 있었지.

왜 엄마는 내가 말하는데 대답하지 않아요? 우리 엄만데 왜 대답하지 않느냐고요? 내가 죽으면, 헛되게 죽으면 안 되잖아요. 엄마가 제발 내 말 들어주세요.”

막 따지는 거야.

목사들은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아요. 말로만 했지 실천은 안 한다고요. 그런 예수는 믿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예수를 믿으세요.”

지도 예수를 믿었는데 그란 말을 했어.

태일이가 말을 하는데 가슴에서 막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나는 거라. 몸에 붕대 묶어 놨는데 부글부글 끓는 거라.

엄마, 엄마,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번 대답해 줘.”

크게 한번 대답해 줘, 그렇게 말하는데 계속 막 끓더라고.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내가 미치겠는데……, 겨우 소리를 내어 말했지. 그라니까

잘 안 들려요. 크게, 크게!”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내가 큰 소리로 대답해 줬지.

그라니까 막 끓는 것이 목까지 차올라서 펄떡거리면서 숨을 못 쉬는 거야. 그라니 의사가 와서 목에 칭칭 감은 붕대를 칼로 탁 따니까,

엄마 꼭 크게, 나 잊어버리고 가게. 크게, 크게 대답해 주세요.”

그라는 거라. 그리고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소리치면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그라면 또 피가 퍽 쏟아지고……. 그라다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라져 있다가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2006114, 36주기 추도식을 앞두고 찾아온 서울대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한 뒤 이소선은 꼬박 나흘간 앓았다.

1948826일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열여섯 살 때 서울 평화시장에서 재단사와 미싱사를 보조하는 일을 시작한다. 스무 살 때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동료들과 함께 청계천 주변의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에 흩어져 있는 옷 공장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관계 당국과 공장 주인들의 방해공작이 워낙 거세어 결국 분신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절규했던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 한국의 문제를 상징하는 가장 뜻 깊은 사건이 되었다. 또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삶을 뒤흔들 단 한 권의 책

조영래가 사법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법대 1년 후배인 장기표가 찾아왔다. 그날이 바로 전태일이라는 젊은 노동자가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자살한 19701113일이었다. 옷 만드는 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불길에 휩싸인 채 이렇게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한국일보에 실린 전태일의 분신 기사를 보고 제일 먼저 성모병원으로 달려온 서울대 법대생 장기표는 이소선 여사의 손을 잡고 어머니라고 부른다. 당시 장기표는 후배 이신범과 함께 서울대 법대 지하신문인 자유의 종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전태일이 분신하기 한 달 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신문에 실은 바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장기표는 분신 소식을 듣고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으로 즉시 달려갔던 것이다. 장기표에게 전태일의 소식을 들은 조영래는 시험공부를 중단하고 장례 준비에 나섰다. 19701118, 한 젊은 노동자의 장례식은 그의 삶과 달리 거창하게치러졌다. 이틀 뒤에 서울대 법대에서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발표한 시국선언문은 조영래가 초안한 것이었다.

조영래가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입소를 기다리고 있던 19714월 어느 날, 동아일보에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학생이 기고한 글이 실렸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냉담한 것을 질책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조영래는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그 글을 쓴 이옥경을 만난다. 조영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었을 때 두 사람은 양쪽 집안에서 허락받고 결혼하려던 중이었다. 그런데 조영래가 수배자가 되는 바람에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다. 아예 신혼살림을 차리면 남들이 조영래를 수배자라고 의심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두 사람은 같이 살기로 했다. 이옥경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형사들에게 조영래와 헤어졌다고 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했다. 이옥경은 형사들이 친정집에 다녀가면 그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그날 저녁에는 친정집에 가 있었다.

조영래는 수배 중에 전태일 평전을 쓰기 시작했다. 자료를 수집하는 데 1년이 넘게 걸렸고, 이소선 여사를 자주 만나 구술을 받아 적었다. 1976년에 탈고한 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은 사람은 김정남이었다. 김정남은 일본정의평화협의회의 송영순 바오로에게 원고를 보내 출판을 부탁했다. 그것이 197811월에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 - 어느 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물론 필자와 역자는 모두 가명이었다. 국내에서는 1983년에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를 엮은이로 하여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 책이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그리고 경찰이 출판기념회 장소를 원천봉쇄하고 이소선 여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연금하였다. 하지만 탄압이 거세어질수록 독자들의 사랑은 더욱 뜨거워졌다. 책을 낸 출판사에는 밤 새워 눈물 흘리며 읽었다는 독자들의 편지와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했지만 조영래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출판사는 1990년에 개정판을 내면서 책 제목을 전태일 평전으로 바꾸었고, 저자를 최초로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영래는 개정판 발간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개정판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을 쓰고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조영래가 타계했다. 결국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책을 쓴 저자를 그의 생전에 밝힐 수 없게 되었다. 아마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자 한 조영래의 뜻이 이렇게까지 철저히 관철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그의 절대적 겸손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사랑과 뜻은 이 불후의 저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조영래가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전태일 평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全泰日).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8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1113,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 선언이라고 부른다.

인간 선언.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죽었다.”

교실 밖 국어여행의 저자는 세상에 많은 책이 있지만 삶을 뒤흔들 단 한 권의 책을 누군가 찾는다면 바로 전태일 평전을 권하고 싶다.”라고 했다. 전태일 평전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또 그들을 각성시켰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독서였다. 그 책이 밑거름이 되어 1983328일에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발족할 수 있었고, 1988년에는 전태일문학상도 제정되었다. 

 

지인호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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