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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칼럼] 남의 아픔은 얼마만큼만 내 아픔일까

20210616일 (수) 09:35 입력 20210616일 (수) 09:3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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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세요~
함께사는 세상이요~

살다가 간혹 황당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하는 말을 한다. 맞다. 사람이 되기는 쉬워도 사람답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답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어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일까. 뭐 굳이 딱 정의하지 않아도 우리는 대략 사람다운 사람을 잘 분별한다. 하지만 간혹, 나는 저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데, 내가 믿는 저 친구는 그 사람을 별로 안좋은 사람으로 얘기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땐 좀 헷갈린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걸까. 아니면 그 친구가 착각을 하는 걸까. 그래서 다시 사람답다는 말로 이야기가 돌아온다. 누구나 사람답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넌 사람도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니 사람답다는 말을 한 번 새겨보도록 하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노라면 참 딱한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말에 ‘딱하다’ 할 경우는 두 가지 용례가 있다. 사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 불행을 당한 사람 등을 보고도 딱하다 하지만, 마음 씀씀이가 너무 얇고 가파른 사람을 두고도 딱하다 한다. 매사에 너무 이기적이거나, 생각이 터무니없이 꽉막힌 사람 말이다. 전자는 현재 처지가 어려운 것이고, 후자는 그이가 하는 꼴을 보니 나중에 처지가 어려워질 것 같은 경우인데, 따라서 두 용례는 상통한다 하겠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한 번 돌아보면 참 훌륭한 사람들도 많다. 몸가짐이나 언행도 좋고, 무슨 일을 해도 척척 잘 해내며, 아는 것도 많고 세상 이치를 훤히 꿰고 있는 듯한 사람들  말이다. 세상은 이들을 대략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 등으로 부른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다 사람다운 걸까. 이이들처럼 훌륭하지 못하면 사람답지 않은 것일까. 처지나 언행이 딱한 사람은 사람다울까, 아닐까.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
우선 난사람부터 살펴보자. 난사람은 말그대로 잘난 사람을 말한다. 대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세속적 성공을 이뤘다거나, 자기 분야에서 실력이 짱짱하다거나, 연예인처럼 인기가 많다거나,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 등을 일컫는다. 당대 사회의 대세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람답다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잘난 것과 사람다운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는 것 같다. 이들 중에는 사람다운 사람도 얼마든지 있고, 그저 보통인 사람도 숱하며, 사람답지 못한 사람도 종종 나타난다. 그 분포도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나 비슷하리라 싶다. 
어찌보면 성공을 위해 경쟁자를 가차없이 물리치기도 했을 것이고, 실력이 출중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했을 것이며, 인기가 많다보니 싸가지없는 행각을 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같은 평범한 이들보다는 비인간적인 짓을 더 많이 했을 수도 있다. 간혹 가십뉴스나 세상소문을 들으면 잘난 사람들 중 이같은 일들로 구설에 오르거나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종종 보지 않는가. 그러니 전체적으로는 인간성은 별로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봄직 한데, 사실 이들은 세상에 노출이 많이 되고, 그 여파도 커서 그렇지 이들이 유독 인간성이 좀 그렇다고 볼 하등의 객관적 근거는 없다. 

그는 참 사람이 됐어 
든사람은 어떨까. 들었다는 건 지식이나 경륜이 많다는 것인데, 세상 사는 이치에 많이 통달하여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도리 세우기가 의젓하며, 문리와 물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 그 메시지를 믿고 따를 만한 이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좀 옛날 분위기가 나는 것 같다. 사회가 지금보다는 단순하고 변화발전이 더뎠던 과거에는 뜸들여 쌓은 지식이나 세월에 묵힌 경륜이 삶의 좋은 길잡이가 되었겠지만, 요새처럼 첨단 전문지식이 끝없이 분화되고, 자고 일어나면 달라져 있는 세상에선 그 곰삭은 지식이 큰 지침이 되기 어렵다. 물론 아무리 세상이 뒤집어져도 인간보편의 지혜라는 건 엄존하겠지만, 글쎄 그런 지혜는 당장의 글로벌 생존경쟁의 마당에서는 심판 제대로 보기도 어려울 것 같다. 암튼 든사람이라는 게 과거보다는 힘이 많이 빠진 건 사실이니, 인간다움을 말하는 마당에서는 큰 모델이 되기도 좀 그렇다. 
그렇다면 된사람은 어떨까. 사실 이 된사람이라는 게 ‘사람이 됐다’는 말이니, 사람답다는 취지에 가장 근접하는 경우라 하겠다. 우리는 성격이 모난 사람을 두고 ‘저 사람 참 못됐다’라거나, ‘너는 어찌 그리 못되게 구니’라고 하는데, 이 경우가 바로 그 반증이다. 그렇다면 된사람이란 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사람이 됐다는 말에는 인간됨의 정의가 전제돼 있다. 일반적으로는 인격적으로 덕이 있다는 말이겠지만, 그 덕이라는 게 시대따라 문화따라 그 의미가 좀 달라진다. 

인의예지신
어떤 사회문화권에서든 사람다움에 대한 규정은 보다 질서있고 체계적이며 생존 번영에 도움이 될 인간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시대따라 세상따라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외부환경이나 내부질서는 늘 변화하기에, 이에 부응해서 그 사람됨을 잘 설정해야 사회도 개인도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이에 실패한 사회는 당연 아노미적 혼란을 겪다가 도태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한 시대나 사회에서 인간됨에 대한 생각들이 딱 떨어지게 규정되진 않는다. 그래도 대략적인 사회전체의 암묵적 동의는 형성돼야 한다, 그래서 사소한 갈등들로 인심들이 출렁거릴지라도 사회라는 큰 배는 그런대로 항해를 해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사회는 대략 어떤 양태의 인간성을 사람답다고 규정하는가. 유교문화가 대세였던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나라(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을 으뜸으로 쳤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차례로 내세웠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강조했다. 의리는 목숨보다 중요했기에 아직까지 우리사회에는 시정잡배도 의리를 내세우고 있다. 충과 효가 상충할 경우엔 효를 더 우선했다. 유교는 생판 남인 부부가 만나 새 공동체를 이루는 가족을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단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전 구성원은 (보통 가부장인 아버지는 자발성을 보이지 않을 경우 열외다) 멸사봉공해야 했다. 엄마는 마땅히 가족의 거름이었고, 큰누나는 동생들을 위해 학업도 뒷전으로 돌리고 공장에 나가 일해야 했다. 누나의 희생으로 출세를 한 장남이 가족은 나몰라라 하고 제 처자식만 거둔다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손가락질 했다. 그리고 그 집안은 사실 사회적으로는 ‘망한 집안’이다. 이렇듯 충과 효에 충실한 사람이 가장 된사람이었다. 효도에 밝은 사람이 건방지고 무책임하고 사나울 리가 없으니 모든 인간됨은 사실 효로 집약되고 상징된다 하겠다. 이는 종족보전 본능에는 충실한 이념이지만 개체보전 본능에는 역행하는 가치다.   

나 좋으면 그만인가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가. 전통사회의 그것과의 대척점에서 인간됨을 찾는 게 빠를 것이다. 개인주의와 이에 바탕한 능력지상주의와 이 개인주의가 왜곡된 이기주의 등이 그 특징이다. 이는 전통사회의 가족집단주의에 짓눌렸던 개체영혼의 반작용이기도 하고, 서구 과학기술의 힘에 경탄한 자발적 수용이기도 하고, 나라까지 빼앗긴 선조들의 문약함을 극복하고 어엿한 선진대열에 합류한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됨에 대해 오늘의 우리사회가 대체적으로 동의한 뚜렷한 규정은 잘 찾을 수 없다. 변화가 한창 진행 중인 곳에서는 그 진면목을 찾기가 난감하다. 필자의 역량 탓도 있고, 세상이 너무 급변하고 또 복잡다단한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문명사적으로 인류는 사상초유의 정체성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과학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탓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태아는 언제부터 사람인지, 안락사는 살인인지 아닌지, 육신에서 분리되어 영양액 속에 담긴 채로 살아있는 뇌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지, 블라인드 실험으로는 인간과 구별 안되는 인공지능의 경우는 어떤지, 사람의 뇌와 비슷한 뇌를 가진 로봇은 사람이 아닌지, 대체장기를 마련키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 둔 나의 복제인간은 또 어떤지 등등 머리 아픈 난제들이 늘어만 간다. 이러니 어찌 인간에 대한 정의라는 게 가당키나 할텐가.

정이 가는데 어쩌라구
그래도 우리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인간됨에 대한 어떤 암묵적 동의가 있고, 이는 실제 잘 작동하고 있다. 바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다. 우리는 먼 옛날부터 그리 살아왔고, 그런 사람을 ‘참 사람됐다’고 칭송했다. 민족의 원형질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인류보편의 인간됨이라 할 것인데, 다만 현대인들이 많이 잊고 살다가 다시 찾아낸 것이지 싶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지각할 수 있고, 이에 공감할 수 있다. 동서고금 모든 인간은 그랬다. 인류사 한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고, 가난한 자도 인간이 아니었으며, 흑인도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그토록 억압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인간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인간다운 자들이 편견에 맞서 힘겹게 싸워서 눈먼 인간들의 눈이 많이 열렸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남의 아픔에 동참하기를 잘 한다. 아니, 즐겨한다. 우리는 어떤 시대 어떤 주류이념 속에서도 인간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인간미’있는 사람들이었다. 넓게는 ‘따뜻한 정’이 넘치는 핏줄들이다. 필자는 지구촌을 부는 한류바람도 그 바탕에는 인류 보편애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저도 모르게 공감하고 열광하게 되는 게 아닌가. 잃어버린 사람됨을 다시 찾은 기쁨. 우리에게는 그 기쁨을 선도할 인류사적 사명이 있다고 믿고 살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이제 본궤도에 올렸으니, 다음 과제는 그게 됐으면 좋겠다.    
 
전인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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